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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역 광장 전경. 밀양은 볕이 촘촘하다 해서 밀양이고 비밀스런 볕이라 해서 밀양이다. 사진=박정화 | |
도연. 누이친구 같은 도연. 누이친구를 마음에 담아 두고 두근대는 심사를 아시는가. 누이를 시켜서 불러내고 불러내고서는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하는 심사를 아시는가. 딴전 피우다 돌아서는 그 심사를 아시는가.
도연. 면전에서 못한 말이 나를 찌른다. 말로는 못한 말이 생가시가 되어 나를 찔러댄다. 가시에 찔린 부위가 부어오른다. 부어 올라 내 눈을 감기고 도연을 담아 둔 내 마음을 감긴다. 나는 눈멀고 마음마저 먼다. 하지 못한 말이 나를 멀게 한다.
밀양을 걷는다. 도연이 머문 밀양을 걷는다. 햇볕 촘촘한 밀양이 아닌 햇볕 비밀스런 밀양을 걷는다. 햇볕이 촘촘하다 해서 밀양일 터인데 비밀의 햇볕이라. 처음엔 수긍할 수 없는 이름 풀이였지만 이제는 그게 편하다. 눈멀고 마음마저 먼 주제에 촘촘한 햇볕은 가당찮다.
비밀의 햇볕이라. 사실 얼른 맥이 잡히지 않는 말이다. 비밀이 가진 내밀함과 햇볕이 가진 드러냄이 상충되는 말이다. 앞뒤 장단이 맞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햇볕 없는 사람살이가 없듯이 비밀 없는 사람살이 또한 없다. 사람살이 대목대목에 햇볕은 드리우고 햇볕이 드리우는 대목대목에 비밀은 도사린다. 햇볕이 있어 비밀이 비밀답고 비밀이 있어 햇볕이 햇볕답다.
걸음을 멈춘 곳은 밀양역 광장. 도연이 거리 선교를 하던 곳이다. 찬송하며 선교하던 곳이다. 도연이 서 있던 자리를 본다. 도연이 서 있던 자리에 선다. 도연을 따라다니던 남자처럼 나도 종교를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나를 이 자리에 서도록 한 힘은 종교가 가진 힘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사랑의 힘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스며들고 싶은 사랑의 봉긋한 힘이다.
사랑은 힘이다. 사람이 가진 사랑은 양면을 가진 힘이다. 사람 마음을 불어터지게 하는 것도 막혀서 불어터지는 마음에 숨통이 트이게 하는 것도 사랑이 가진 양면의 힘이다. 말 잘 하던 사람이 사랑 앞에 서면 말문이 얼어붙는 것도 말 못하는 사람이 사랑 앞에 서면 전혀 딴 사람이 되는 것도 사람이 가진 사랑의 양면이다.
역 광장은 뜨겁다. 매미 울음소리가 뜨겁고 볕이 뜨겁다. 땡볕이라서 광장을 가로질러 다니는 사람들 발걸음이 재다. 촘촘하다. 땡볕이 사람들을 몰아붙인다. 그러고 보니 알 것 같다. 비밀의 볕 '밀양'이 이야기한 것은 햇빛이 아니라 햇볕이란 것을. 햇빛이 나오는 곳을 우러러보는 이야기가 아니라 햇빛이 닿는 곳인 볕, 사람 사는 곳 이야기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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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소리가 들린다. 음악소리는 대합실에서도 나오고 청년들이 광장에 설치한 확성기에서도 나온다. 청년들은 생음악이다. 백혈병에 걸리고 소아암에 걸린 어린이 돕기 기금조성 자선공연이다. 남자가 부르고 나면 여자가 부르고 여자가 부르고 나면 남자가 부른다. 매미 소리가 여름에 찬물을 뿌리듯 청년들 생음악이 달아오른 광장 바닥에 찬물을 뿌린다. 시원하다.
여자가 부른다. 가냘픈 여자가 가냘프게 부른다.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노래 틈틈이 '한 아이 두 아이 세 아이 소중한 생명을 살려내자'고 호소한다. 가냘픈 노래가 가냘픈 호소가 사람을 그냥은 지나치지 못하게 한다. 모금함에 들러서 가게 한다. 그때마다 여자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다.
사랑. 사랑은 대체로 과거이다. 사랑이 있었다고 대체로 말한다. 있었던 사랑을 그리워하며 있었던 사랑에 아파한다. 그러면서 있었던 사랑은 현재가 된다. 지나간 사랑도 현재이고 있었는지조차 몽롱한 옛사랑도 현재이다. 지나간 사랑이란 아예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그렇게 덮어두려는 것일 뿐 사랑이란 사랑은 모두가 지금 현재이다.
사랑은 현재이다. 과거가 될 현재이다. 있었던 사랑은 과거이면서 현재이고 있는 사랑은 과거가 될 현재이다. 있었던 사랑도 있는 사랑도 지금 현재를 애틋하게 한다. 애달프게 한다. 도연. 도연은 그런 사람이 없으신가. 사랑한다 사랑한다 한 백 번쯤 되들려 주고 싶은 사람. 과거이면서 현재이고 현재이면서 과거인 사랑은 없으신가.
기차가 들어온 모양이다. 잠깐이나마 광장에 활기가 찬다. 짝을 지은 남녀가 도연이 이 곳에서 촬영했다는 안내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안내판 하나는 도연이 역광을 배경으로 서 있는 포스터다. 남녀가 떠난 자리에 내가 선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여기서 새로 시작할 거야." 그 여기에 내가 선다.
도연.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던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골짝에 들어가 혼자 밥 먹고 혼자 잠자던 날들. 낫질을 할 줄 몰라 장작에 불을 붙일 줄 몰라 마당엔 잡초가 무성하고 아궁이엔 거미줄이 쳐져 있던 도연 나이 무렵. 한창때 나이인 나를 그렇게 몰아넣은 내가 못마땅하고 낫질에 베인 것 같은 상처를 준 내가 용서가 안 된다. 장작불 지피다가 데인 것 같은 상처를 나에게 준 내가 아직도 용서가 안 된다.
사랑에 '상처받은 영혼'이라서 오열하던 도연. 사람 사는 곳에서 받은 상처를 사람 사는 곳에서 씻어내려던 도연. 용서하려던 도연. 사랑이 사람 사는 곳 일이라면 용서 역시 사람 사는 곳 일이다. 상처받은 내가 용서하지 않는데 나 아닌 남이 용서할 수 있느냐는 절규에 나는 동의한다. 나 아닌 남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는 의문에도 동의한다. 사랑도 용서도 사람 사는 곳 일, 사람이 져야 할 짐이다. 사람의 몫이다.
매미 소리는 도돌이표다. 돌아가면서 운다. 한쪽에서 울다가 그칠 즈음이면 다른 쪽에서 운다. 비밀의 볕에 저녁이 오기 전에 저녁이 와서 볕을 거두어 가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없다. 고작 매미 소리를 모조리 담아 두는 정도다. 담아 두고서 도연이 울 틈이 없도록 내가 하루 종일 촘촘하게 우는 일이다. 들리시는가 도연. 그치지 않고 우는 매미 소리가.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백 번도 넘게 천 번도 넘게 숨넘어가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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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이 영화 '밀양'의 무대임을 알리는 안내판 | |
영화 '밀양'. 전도연을 한국 A급 배우에서 국제적인 스타로 띄운 영화다. 가슴 속 응어리를 쥐어뜯는 열연을 통해 전도연이 세계 3대 영화제 하나인
칸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것.
감독은 이창동. 영화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에서 독특한 캐릭터를 연출한 감독이다. 밀양 연출 직전까지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밀양'은 5년 만의 복귀작이다.
'밀양'의 주제는 사랑과 용서. 한 여인이 겪은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인간과 신,
구원에 대해 용서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용서는 신의 몫이 아니라 인간의 몫임을 항변하는
전도연 내면연기가 압권이다.
밀양시에는 곳곳이 '밀양'이다.
전도연 거리, 칸영화제 수상축하 현수막,
촬영지임을 알리는 숱한 안내판들. 감독과 전도연, 그리고 '밀양'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간 주역인 김해사람 송강호는 명예시민이 됐다.
'최고의 감독과 최고의 배우들'이 만난 '밀양'.
'밀양' 곳곳이 밀양이고 밀양 곳곳이 '밀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