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그룹

문재인이라는 사람

石泉 2010. 5. 2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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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4

문재인이라는 사람


1년 전 5월 23일, 토요일 아침에 큰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은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노 전 대통령 서거’라는 TV자막을 보고, 건강이 좋지 않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거한 것으로 잘못 알 정도였습니다.

그 날 오전 11시, 문재인(57)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의 말은“슬픈 소식, 입니다.”로 시작됐습니다. ‘소식’과 ‘입니다’ 사이에 쉼표 하나 찍을 만큼의 휴지(休止)가 있었던 그의 말은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오늘 오전 9시 30분경 이곳 양산의 부산대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그리도 침착하고 냉정할 수 있었을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고 팔 다리가 후들거릴 일을 당하고도 어떻게 그리 담담하고 정제(整齊)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그리 냉정할 수 있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문씨는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 앞이 캄캄하고 경황이 없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고 대답했더군요. 여러 가지 판단과 결정이 필요한데 자신까지 감정에 휩싸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 그 책임감이 자신을 지탱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노무현 재단 상임이사인 문씨는 한명숙 전 총리가 서울시장 후보 출마와 함께 이사장 직을 내놓음에 따라 이사장 직무대행으로 노 전 대통령 1주기 추도행사를 치르는 데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단순히 고인을 그리워하는 차원보다는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가치를 계승하고 확산되도록 하는 데 행사의 의미를 두었다고 합니다.

그가 인상적이거나 돋보이는 이유는 물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재단의 이사장은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그 자신의 성격대로 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처신을 하는 덕분에 오히려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것 같습니다. 출마 권유를 많이 받았고 심지어 어떤 전직 의원은 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는 정치 제의에 다 응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김정길 부산시장 후보의 선대위 명예위원장이라는 명목만의 자리를 하나 맡고 있지만 선거 지원이나 득표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노 전 대통령 당시 청와대에 들어갈 때에도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하고 다짐을 받았다고 합니다. 정치를 직접 해본 적은 없고 가까이서 봐왔지만, 자신은 체질이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정치에는 필요한 자질이나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부족하고 정치가 굉장히 중요한 것은 맞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저를 혹시 괜찮게 생각해 준다면 정치를 안 하기 때문이죠. 저도 정치를 하면 금방 똑같아지겠죠.”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정치를 한다면 금방 똑같아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공직을 떠난 사람들은 바로 직무 관련성이 높은 곳에 취업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래서 말썽이 많이 나는데, 그는 청와대에서 나왔을 때 곧바로 변호사를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여러 달 쉬다가 복귀했다고 합니다. 그는 두 달 전 소리소문 없이 딸을 시집 보냈습니다. 청와대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부인에게 백화점 출입을 못하게 했다는데,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 직전, 어느 자리에서 그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면서 “사람은 친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다”라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의 묘역에 깔린 1만 5,000개의 박석(薄石) 중 하나에 그가 새겨 남긴 글은 “편히 쉬십시오.”입니다. 많은 말이 담긴 글입니다. 과연 깔끔하고 침착한 그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 전 대통령이 점차 잊혀지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문씨는 차분하게 내재화ㆍ내면화해 가는 과정이라는 해석을 했습니다. 그가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잘 모르지만, 하나의 인상적인 인물형으로 관심 있게 계속 지켜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년부터 한국일보 근무. 현재 주필. 시와 술과 유머를 사랑하고,
불의와 용렬을 미워하려 애쓰고 있음. 호는 淡硯(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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