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그룹

말로써 말이 많으니

石泉 2013. 7. 18. 08:27

www.freecolumn.co.kr

말로써 말이 많으니

2013.07.18


사람이 하루 동안 머릿속에 떠올리는 상념의 수가 얼마나 될까?
일반 성인의 경우 5만~6만 가지라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연구한 성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떠오른다는 말을 흔히 써 왔습니다. 어쩌면 과학세계의 탐구 결과와 딱 맞게 일치하는지 감탄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생각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불교에서는 삼독(三毒)으로 설명합니다. 탐(貪: 욕심) 진(瞋: 분노) 치(癡: 어리석음)가 삼독입니다. 다른 종교학자들은 여기에 공(恐: 두려움)을 보태 오만 가지 인간의 생각을 크게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합니다.

물욕 명예욕 성욕 등이 탐심에, 분노 질투 교만 등은 진심에,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등은 치심에 속합니다. 공심은 재산 명예 건강 의지 등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을 이 네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마음을 구분해 온 틀입니다.

탐 진 치 공은 모든 번뇌의 근원이므로 불교에서는 이들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려면 해탈(解脫)을 해야 열반(涅槃)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에서는 회개(悔改)해야 영적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매 순간(每) 마음(心)을 가다듬어 부끄럽거나 죄스럽지 않은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改)이 진정한 회개라고 합니다.

오만 사람들의 오만 가지 생각 중에 튀어나온 ‘귀태’(鬼胎)라는 생경한 말이 온 나라를 끓게 하고 있습니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 대변인이 고 박정희 대통령을 귀태에 비유해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라고 한 발언 때문입니다. 여당이 발끈하여 임시국회의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청와대가 격앙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귀태라는 단어는 웬만한 사전에선 찾아 볼 수 없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두려워하고 걱정함 *나쁜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귀신의 자식 *혼외 자식을 지칭하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의학용어로 태아와 양수를 싸고 있는 융모막이 포도송이 모양으로 이상 증식하는 병, 즉 포도상 귀태를 뜻합니다.

홍 의원이 출처를 밝히고 인용한 책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박정희’의 저자 강상중 일본 세이가쿠인(聖學院)대 교수(재일 한국인 2세)는 귀태라는 말은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조어(造語)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다만 이 단어는 “태어나서는 안 될, 불길한, 사위스러운 같은 부정적 뉘앙스가 강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일본 역사소설의 대가로 꼽히는 시바는 (만주국을 만든) 관동군의 독주로 시작된 러일전쟁(1905)에서부터 2차 대전 패전(1945)에 이르는 다이쇼(大正) 쇼와(昭和)시대 40년을 일본 역사의 ‘비연속적 시대’ ‘근대 일본이 낳은 귀태’라고 규정했습니다. 강 교수는 시바의 조어에서 풍기는 뉘앙스까지 유추하고, 한 시대에 대한 평가를 그 시대를 산 사람에게까지 확대 치환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홍 의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 박근혜와 아베 신조(기시의 외손자)가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 아베는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고 있고, 박 대통령은 유신공화국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며 “역사의 진실을 부정하고, 미래가 아닌 구시대로 가려 하는 두 정상의 행보가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대변인이 되기 직전인 4월 23일에도 홍 의원은 “18대 대선 결과는 무효다. 아버지 박정희는 군대를 이용해 대통령직을 찬탈했고, 그 딸인 박근혜는 국정원과 경찰 조직을 이용해서 대통령직을 도둑질했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홍씨와 박씨 집안 간에 무슨 악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국회의원 자격으로 한 말치고는 수위나 품격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因緣)이라고 합니다. 불문(佛門)에선 인연을 겁(劫 Kalpa)이라는 시간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1겁은 천지가 한 번 개벽하고 다음 개벽이 시작될 때까지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사방 사십 리의 철성(鐵城)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 년에 한 알씩 꺼내 다 비워질 때까지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같은 나라에 태어나는 것은 1,000겁, 하룻길을 동행하는 것은 2,000겁, 하룻밤을 함께 묵는 것은 3,000겁, 부부로 맺어지는 것은 8,000겁, 형제로 태어나는 것은 9,000겁, 부모나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것은 10,000겁에 한 번꼴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나는 인연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것인지 숙연해집니다.

인지(認知)과학에서는 보통사람이 일생 동안 이름과 얼굴을 동일인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 수가 2,000 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고운 사람  미운 사람, 죽일 놈 살릴 놈 따위의 이분법으로 편을 가르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가 봅니다. 인연의 소중함을 모르는 소치이겠지요.

그래서인지 범부들의 말조차 갈수록 험해지고 있습니다. 흉기는 아니지만 말은 한마디로 남을 죽일 수도 있을뿐더러 자신에게 치명상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한 번 뱉은 말은 엎질러진 물처럼 도로 그릇에 담을 수도 없습니다. 막말에 대한 보상은 성범죄자의 주홍 글씨나 전자 발찌처럼 족쇄가 되고, 후손들에게까지 멍에를 씌우기도 합니다.

“옛날 학문하는 사람은 자기를 연마하기 위해 노력하나, 요즘 사람은 배운 것을 곧 남에게 알려 자기 것인 양 하려고 한다. 또 묻지도 않은 말을 입 밖에 내고, 하나를 물으면 둘을 말한다. 진정한 군자는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고 물으면 묻는 것만 대답한다.” 기원전의 철학자 순자(荀子 BC298?~BC238?)의 훈계입니다.

그래서 말을 하려면 침묵보다 더 값진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귀태(貴態)가 나니까.

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