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법정에 서는 마음가짐

石泉 2008. 4. 24. 09:11
  법정에 서는 마음가짐 |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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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막할 뿐이었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지엄하신 판사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자료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검사님은 산더미같은 자료를 쌓아놓고 있고, 변호사님은 별 말씀이 없으시네요. 제 인생을 결정지을 이 재판은 길어봐야 30분.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뭘 말해야 될지도 모르고.. 대한민국 법정의 풍경. 이렇습니다!

 

  대학시절, 한 시민단체를 통해 "법정 모니터링"이란 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왠지 거창해보이는 이름에 부푼 가슴으로 서초동 법원가에 들어섰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법정을 모니터링한다라.. 말 그대로 재판을 받는 법정을 평가하는 일입니다. 재판과정 중에 지켜야 할 공개원칙을 기준으로, 높고 높으신 판검사님들과 변호사님께서 얼마나 잘하고 계시나를 감시하는 거죠. 법정 뒤쪽까지 잘 들리게끔 마이크를 사용해야 하는 것부터, 어려운 법률용어 대신 쉬운 생활어로 풀어서 설명하는 점까지 살피며 수십 번의 재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법정 관람객으로 앉아있을 때의 마음은 무겁고 착잡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이 사람들의 상황이 안타깝기도 하거니와, 이 지루하고 일상적인 재판 패턴이 바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지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예비판사를 보고 한숨을 잔뜩 쉬고, 자기가 한 발언이 얼마나 재판결과에 영향을 줄지 생각도 못하고 일단 변명이라도 하고 본다고 끝도 없이 얘기를 꺼내는 피고인까지 보면 오 마이 갓! 오금이 저릴 정도 입니다. 평범한 한 대학생의 눈에도 이럴진데, 한 양심적인 현직검사에게는 이런 상황이 마뜩치 않았겠지요. 주요일간지에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란 이름의 칼럼을 통해 "피의자로 조사를 받을 때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 조서에 함부로 도장찍지 마라." 등의 방법을 말한 이 검사는 얼마 후 옷을 벗게 되었습니다.

 

 

<디케의 눈>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바로 금태섭 변호사입니다. 얼마전 국민참여 모의재판에 변호사로서 참여하기도 해, 다시 한번 주목을 끌었습니다. <디케의 눈>을 통해 다시 대중앞에 섰습니다. 항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금태섭 변호사가 보는 법은 어떤 것인가 궁금해 책을 펼쳤는데, 단숨에 첫장을 읽어내려갔습니다. 저자가 직접 겪었던 법률적 상황들이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한 꼭지를 보듯 눈에 펼쳐졌습니다. 사법연수원생일 때부터 검사를 거치면서 있었던 사건들은 마치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범인은 모호하고, 정황은 애매하고, 증거를 찾아 사건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놀라운 상황이 펼쳐집니다.

 

 

  저자의 경험담부터 유명한 판례에 이르기까지 18편의 이야기를 통해 일반 국민들 뿐 아니라 판검사나 사법당국과 같은 법체계가 약자와 소수를 위해서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건과 그 처리 결과를 보면서 자칫 딱딱하고 차갑게 여길 수 있는 법을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례들을 풍부하게 소개합니다.  LA우범지역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중, 물건을 훔친 흑인소녀에게 구타당하다가 우발적으로 총을 쏴 죽여 처벌을 받은 한인 교포의 사건에서 "왜 죄를 저지른 사람을 처벌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형량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죄를 벌하는 것을 떠나, 사회적 문화적으로 형량과 형벌이 어떤 식으로 의미부여가 되는지 원론적인 얘기마저 아주 흥미롭게 들려줍니다. 이렇게 법을 다루는 과정이 대중과 한발 가깝게 설 수 있지않나 싶습니다.

 

  법의 여신인 디케는 두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으로 유명합니다. 심판을 해야 할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을 배제하고 죄만으로 평가하기 위해 눈을 가린 게 아닐까 하는 짧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케가 양 손에 들고 있는 저울과 칼은 오랫동안 법의 상징으로 자리잡아 왔습니다. 저자는 디케가 눈을 가린 이유가, 법이 실제로 적용되는 현장에서 보면 법을 통해서 진실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말합니다. 디케가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진실을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틀릴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법은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위험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말이죠.

 

 

<헌법의 풍경>

  학생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법과 관련된 책 한권을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연히 모든 법은 옳은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180도 뒤집어주었던 흥미진진한 대한민국 헌법 스토리!

  이 책은 먼저 정의(正義)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평온하고 안정된 사회로만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승자의 일방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하니다. 이것은 안정된 것이 아니라, 주먹의 폭력이 아닌 법의 이름을 빌려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폭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헌법과 법률의 목적은 흔히 오해하듯 국민을 통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국가 권력의 괴물화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법률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가진 변호사, 판사, 검사를 비롯한 법률가들은 청지기라는 본래의 소명을 저버린 채 자기 집단과 권력자를 옹호하는 데 지식과 능력을 악용해왔다며 이를 "아픈 역사"라고 부르는 과감함도 보여줍니다. 우리 법률가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왜곡된 법조 문화와 처참하게 낮아진 시민의 기본권을 논의합니다.

  이 사회의 모든 규율과 법을 믿어왔던 저같은 평범한 국민에게, 사회를 보는 틀 자체를 새롭게 만들어준 아주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법이 하라는대로 살아온 누군가라면, 한번쯤은 법을 의심하고 법률가들의 책임을 평가하기 위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현재 희망제작소와 아름다운 재단의 이사이자 유명변호사인 박원순이 세기의 화제가 됐던 대표적인 재판 10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는 또다른 재미가 있는 법률관련책입니다. 

  생생하게 사건을 소개하고있어, 마치 사건 현장을 넘나들며 역사책이나 법전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감형과 탈출 가능성을 모두 버리고 스스로 죽음을 택해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고 강력하게 아테네의 질서와 법에 도전한 소크라테스, 주기도문을 외워보라는 주교에게 자신의 주기도문을 들을만큼 돈독한 신자임을 신앙고백하라고 요구하거나 반복된 질문은 언제 어느때 답변한 문제이니 기록을 보라고 충고해 오히려 재판관을 당황케 한 잔다르크, 성 표현에 대한 오랜 금지의 시대를 끝낸 D.H. 로렌스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 흥미진진한 재판이야기에 책 한권을 훌훌 읽어버렸습니다. 

  <디케의 눈>이나 <헌법의 풍경>처럼 법 자체의 성격을 다시 살펴보거나 정의를 논의하는 책은 아닙니다. 재판과정과 당시 사회를 통해, 법이 어떻게 개인 생활에 작용하고 사회적 영향을 주었나 하는 점을 살펴볼 수 있으며 더불어 유명인사들의 말로를 확인하는 재미가 두 배로 쏠쏠했습니다.

 

 

  내가 LA 한인타운에서 흑인여학생을 쏜 두순자였다면, 트럭 뒷바퀴에 휩쓸린 중학생이었다면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어떤 비통한 심정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도 가득했습니다. 국민이 법과 법률가를 믿는만큼, 법과 법률가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국민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람에서 이러한 책들이 조금이라도 더 읽히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은 이런 대화를 통해 발전하는 유기적인 존재이며, 이로써 더 성숙한 한국사회가 될 수 있음을 독자 여러분들도 느끼실 수 있는 짜릿한 독서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