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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한 어촌마을, 대마도

石泉 2007. 11. 8. 14:18
[내 마음 속의 이곳] ⑧ 소설가 박명호...고적한 어촌마을, 대마도
순한 바다 위로 내려앉은 느린 시간들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복도 맨 끝 쪽 방, 미닫이문을 열면 호수 같은 바다가 낮게 펼쳐져 있다. 며칠은 족히 빈둥거릴 수 있다. 그곳은 느리게 흘러가는 오래된 시계가 걸려 있고, 늘 외로운 내가 있다. 우리네 일상이란 것이 늘 빠른 여울물처럼 흘러가 버린다. 때때로 일상에서 빠져나와 그 여울물 같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대마도의 작은 어촌마을을 찾는다. 그곳은 내가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적당한 외로움과 조용한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

소설가 박명호는 대마도의 한적한 어촌마을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겪고 나서야 '나'라는 실존과 마주할 수 있게 됐다.
'나'라는 실존은 언제나 혼자서 외로움에 젖어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고는 만날 수 없다. 가족을 비롯한 인간관계가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중년은 그야말로 외로워질 여유마저도 없다. 그런 여유를 가져보려면 한적한 시골마을 여관 같은 데서 며칠 묵는 것이 최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선 그런 시골 여관을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부산에서 한 시간 정도 바다를 건너면 전혀 바쁘지 않는 한적한 어촌들과 여관이 있다.

이국이라지만 대마도는 너무 가깝고 가기도 쉽다. 부산 앞 바다에 그렇듯 조용하고 자연이 잘 보존된 큰 섬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우리나라 땅이 아니면 어떤가. 원래 자연이란 주인이 없어서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주인이고 보면, '風月(풍월·자연)'은 일본 사람의 것도 한국 사람의 것도, 돈 많은 사람의 것도 돈 없는 사람의 것도 아니다. 굳이 소유 개념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즐기는 자의 것이다. 그런 '風月主人(풍월주인)'의 정서는 우리 선비들의 가장 보편적 가치관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대마도를 가는 데 아무런 제재가 없다. 번번이 길이 막히는 우리네 명승지보다는 훨씬 접근하기가 쉬우니 우리 땅보다 더 우리 땅다운 곳이 아닌가. 그야말로 어느 날 머리가 복잡하여 좀 쉴 요량이면 마실 가듯이 훌쩍 갈 수 있는 곳이다.

부산에서 한 시간 만에 도착한 상대마도의 히타카츠(比田勝)는 너무나 조용한 항구다.

풍랑이 없으면 마치 호수를 건너는 듯하다. 배를 같이 타고 온 한국인 승객들만 다소 붐빌 뿐 섬은 그림 속의 정물처럼 조용하다. 대부분이 낚시꾼인 한국 승객들마저 하나 둘 떠나면 부두는 갑자기 텅 비어버린다. 아니 항구는 적막하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무리 조그마한 항구라 해도 어느 한쪽에선가 분명 공사판이 벌여져 있을 것이고, 또한 땅 파헤쳐지는 기계 소리가 시끄러울 것이다. 거기는 우선 공사하는 곳이 없다. 그래서 옛것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대마도의 어촌들이 오히려 옛날 우리 어촌의 분위기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별한 계획이 없이 떠나온 나는 갑자기 조용해져버린 부두 한쪽에 가방을 깔고 앉아 담배를 피운다. 자,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이곳에선 그 무엇에도 간섭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먹고 자고 행동하고 사고할 수 있다. 그야말로 지겨울 정도로 빈둥거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슬슬 배가 고파오기 시작하면 시내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히타카츠는 시내랄 수 없는 조그마한 어촌이다. 식당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한동안 해변을 걷다 보면 우체국이 보인다. 그러면 나는 거의 예외 없이 엽서를 쓴다. 주로 집에 있는 딸애에게 보낸다. 젊은 날엔 여행을 가면 그 흔적을 남기기 위해 곧잘 엽서를 썼다. 대학시절 내 엽서는 아는 여학생들에게 무척 인기가 있었다. 여행지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것이었다. 딸애에게도 그 이국의 작은 항구의 냄새를 전하고 싶어졌다.

히타카츠에서 적당히 걸어다니다가 버스를 타고 다음 마을로 건너간다. 버스도 띄엄띄엄 있다. 어차피 급할 것도 없으니 거기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버스 안도 텅텅 비어 대개는 자가용 같다. 미안한 생각이 들어 때때로 운전기사 뒷자리에 앉아 서툰 말동무가 되기도 한다. 한둘 앉아 있는 승객도 노인이고, 운전기사도 노인이다. 아, 그곳은 노인 공화국이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인다. 버스 역시 아주 천천히 바쁠 것 없이 움직인다. 나는 대마도의 그런 느린 시간이 좋다.

조그마한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사스나(佐須奈)에 도착한다. 사스나는 매우 아름다운 포구다. 길가의 간이 버스 정류장 의자가 참 예쁘게도 놓여 있다. 배낭을 풀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물면 저만큼 굽이진 길 양쪽에 간판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미곡점(米穀店), 농협, 은행, 현금 써비스 센타, 채플린 수염이 그려진 컷 가게, 우체국 들이 정겹게 이어진다. 수십 년 과거 속으로 여행을 온 것 같다. 아마 우리의 고향들이 바람직하게 발전 변화해왔다면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다를 끼고 이어진 마을길 따라가며 묵을 만한 여관을 찾는다. 하라(原) 여관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늙은 주인은 손님이 와도 모른다. 분위기가 아니다 싶으면 다시 50보 정도 걸어가면 훨씬 아담한 여관이 있다. 이층 방은 온종일 바다를 배경으로 누워 있을 수 있다. 누워 뒹굴다가 지겨우면 자전거를 빌려 타고 차가 없는 어촌 길을 산책하듯이 돌아다닐 수 있다.


처음 내가 그곳을 찾았을 때는 행사가 있어서 빈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웃 마을로 갔다. 여전히 버스는 텅 비었다. 중간중간 하굣길의 중학생 몇몇이 탔다가 내렸지만 거의 나 혼자 타고 갔다. 버스가 미네(三根) 정류장에 도착했다. 분명히 기사에게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알려줬는데도 기사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내려 버렸다. 버스 안이고 정류장이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낯선 곳에서 버스와 나 혼자뿐이었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우주 밖으로 나 혼자 튕겨나온 느낌을 받았다.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유치환의 '생명의 서' 중에서)



그때 나는 내 한 생이 압축되어 있는 나를 봤다. 짧은 경험이었지만 외로움은 어마어마한 공포처럼 엄습해왔었다. 때때로 내 실존적 모습을 떠올릴 때면 나는 그 정류장 버스 안에 혼자 있던 장면을 떠올린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어야 하는지 멍한 상태에서 나는 버스를 지키고 있었다. 잠시 뒤에 기사가 나타났다. 화장실에 갔다 오는 모양이었다.

오 분가량 달렸을까. 바다를 낀 다리 앞에 버스가 멈췄다. 드디어 기사는 버스도 버려 두고서(어차피 손님이 없으니) 내가 가고자 하는 오하시(大橋) 여관까지 길을 안내해 주었다.

전통 일본 여관이었다. 이층의 다다미방에 짐을 풀었다. 미네 마을과 앞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산 위의 하늘은 노을빛이 짙었다. 어스름이 스며들고 있었다.

뭘 해야 하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나는 무엇 때문에 아무 볼 것도 없는 이 시골마을을 찾았는가.

조금씩 외로움이 밀려든다. 그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악(그 분위기에 꼭 맞는)이 들려온다. 매우 청아한 음악이었다. 환청인가. 처음엔 나 스스로가 그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떠올린 것이라 여겼다. 도대체 그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고급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보니 음악은 매일 저녁 6시가 되면 마을 확성기에서 들려주는 것이었다. 한때 우리도 저녁 6시면 음악을 들어야 하는 때가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바라보며 애국가를 들어야 하는 때가 있었다. 우리가 애국심을 불태우고 있을 때 바다 건너 이 조용한 어촌에는 하루를 마감하면서 하루를 돌아보며 자연을 닮아가고 있었다.

아무튼 음악은 온 마을에 젖어드는 저녁 어스름처럼 퍼지고 있었다. 짙은 향수처럼 가슴 한쪽이 아슴아슴 아파왔다. 그러나 마을에 울려 퍼지던 음악이 저녁 어스름과 함께 사라지자 나는 다시금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무얼 하지… 무엇 때문에… 근원적 질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대마도를 떠나오면 그 질문은 사라진다.


필자 약력
1955년 경북 청송 출생. 199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장편 '가롯의 창세기', 교육소설 '또야, 안뇨옹', 잡감집 '촌놈과 상놈' 등. 제5회 부산작가상 수상.

/ 입력시간: 2007. 08.23. 0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