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낙화유수'라는 역에서
石泉
2007. 11. 8. 14:28
[내마음 속의 이곳] ③ 시인 유홍준 '낙화유수'라는 역에서
흐르는 강물 같은 곳, 꽃 지고 눈물 피는…
"마음이 낡아빠질 때마다 나도 몰래 발길 가는 간이역
인생은 서럽고 먹먹한 것 일찌감치 가르쳐준 공간
거기서 새로운 시를 만난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흘러간 옛 노래 '낙화유수'를 들으며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께서도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계신다면 저처럼 이 노래를 들으며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훨씬 더 실감이 나실 테니까요.
유수역, 낙화유수역은 진주에서 승용차로 십여 분이면 갈 수 있는 아주 작고 초라한 간이역입니다. 기차역이라고도 할 수 없지요. 좀처럼 시가 안 올 때, 시를 만나기 위해 정처 없이 가는 곳, 그곳은 제 시의 간이역입니다. 제가 그곳에 갈 때는 맨발에 맨몸으로 갑니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 튀어나온 츄리닝 바지를 아무렇게나 꿰어 입고 갑니다. 슬리퍼를 신거나 운동화를 접어신고 갑니다. 그러니까 유수역은 아무런 절차도 형식도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마음마저 낡고 다 낡아빠졌을 때, 허름해졌을 때 찾아가는 곳입니다.
이곳에 오면 저는 자꾸만 '낙화유수'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그 옛날 술에 취한 아버지가 비틀비틀 부르시던 노래, 허무하고 퇴폐적이고 덧없는 노래 말입니다. 한여름 마루 끝에 누워서 아버지의 '낙화유수'를 들을 때는 마루가 끝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수역에 오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유수역은 언제나 텅 비어 있습니다. 올 때마다 유수역은 늘 유수(流水)만 있고 역사(驛舍)만 있습니다. 타고 내리는 사람 하나 없이 썰렁하기만 합니다. 갈 때마다 해가 졌고 올 때마다 밤이었습니다. 아, 딱 한 번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라 부르는 포유류들이 생래적으로 쓸쓸해하는 시각, 사위가 어두워져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창원에 사는 아들네 집엘 간다는, 보따리처럼 작은 시골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이깟 역으로 마실을 나온 마흔 중반의 사내가 할머니는 좀 의아하고 궁금하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날 어둠이 내린 조그만 역사(驛舍) 벤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거든요. 여성으로서의 경계심을 다 놓아버리고 편안해진 할머니가 저도 편안했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이렇게 역(驛)은 제겐 편안한 강물입니다. 위안의 장소입니다. 몇 년 전이었습니다. 갑자기 대구엘 가야하는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문득, 기차를 타고 대구엘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주에서 대구는 고속버스가 젤 빠른데, 기차는 빙빙 돌고 돌아서 시간이 배나 더 걸리는데 글쎄 무엇 때문에 그때 저는 기어코 기차를 타고 싶었던 걸까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제게 있어 역이란 갑자기 오는 시처럼, 덧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옵니다. 아마도 저도 모르는 제가 그걸 애타게 원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막상 검색을 해보니 진주에서 대구로 곧바로 가는 기차는 없었습니다. 삼랑진에서 갈아타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전 좋았습니다. 사실은 삼랑진에 내려야 한다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삼랑진이 유수역처럼 느껴졌거든요.
맞아요. 제겐 모든 역이 유수역이거든요. 낙동강이 있고 역사 저편에 은사시나무며 포플라나무며 큼직큼직한 나무들이 서 있는 삼랑진역도 따지고 보면 유수역입니다. 무엇보다 시를 쓰기 때문에 그날 저는 삼랑진이 고향인 오규원 선생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 밤낮으로 외우던 시 '한 잎의 여자'가 금방 떠올랐습니다. 팔랑거리며 뛰어가던 단발머리 여학생도 함께요.(히히, 제가 그때 한참 한 잎 같은 여학생을 짝사랑하고 있었거든요.)
갓 어둠이 걷히는 새벽 삼랑진역에서 저는 온갖 폼을 다 잡았습니다.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가방 속의 시집을 꺼내 읽었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셨고(웃기지요, 정말!) 역사 저쪽에서 이쪽으로 느릿느릿 왔다 갔다 했습니다. 기차시간도 넉넉해서 아직 여명에 젖어있는 삼랑진 골목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렸습니다. 참 묘했어요.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골목, 그것도 낯선 동네의 골목을 기웃거리고 다니는 느낌은요. 그것은…… 뭐랄까, 문득 낯선 시 하나를 발견하는 느낌, 새로운 시 하나를 만나는 느낌 같은 것이었어요. 그것은 야릇한 설렘 같았어요.
참, 기차역 이야기를 하니까 새삼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십 년 전쯤 IMF가 왔을 때였어요. 제가 다니는 회사도 갑자기 어려워져서 한 달에 반만 출근을 해야 했어요. 저는 잠시 양산 물금 근처로 막노동을 다녔어요. 작업복을 챙기고 장갑을 챙기고 새벽마다 그곳으로 갔어요. 물론 새벽기차를 타고 말입니다.
새벽기차는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고 분위기가 있지만, 사실은 핏발선 눈과 낯선 땀 냄새와 입 냄새로 가득 찬 기차였어요. 새벽기차는 삶이었어요. 그때, 정적과 나른함을 깨우는 소리가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우스워서 혼자 씨익 머금어보게 되는 일이었어요.
아마 함안 어디쯤이었다 생각됩니다. 다들 피곤에 지쳐 곯아떨어져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어요. 허름한 잠바 차림 중년 남자였어요. 그는 누구에겐지 알 수 없지만 휘둥그레 놀란 표정으로 "워메, 여기가 어디여이?"라고 물었어요. 곧이어 "스톱, 스톱!"이라고 소리를 질렀어요.(세상에, 기차를 타고 스톱이라니요^^.) "워메 니기미 ××, 참말로 죽겠네잉, 이 일을 어쩌면 쓰까이!"라고 그는 발을 동동 굴렀어요.
그 광경, 생각을 해 보세요. 얼마나 재밌고 웃겼던지요. 그이는 아마도 술을 한 잔 했던가봅니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곤한 몸이 술에 취해 정신없이 곯아 떨어졌던가봅니다. 밤기차를 타면 아직도 저는 그 낯선 사내가 슬그머니 생각이 납니다. 웃음을 머금어 보게 됩니다. 당황하던 전라도 사내의 사투리에 놀라 잠이 깬 승객들이 이내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던 모습도 선연하게 떠오릅니다.
진주에 내려와 처음 가보았던 가을 역 생각도 납니다. 그때 저는 차가 없었지만 무작정 어딜 가고 싶은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거든요. 어디를 갈까, 진주역 대합실에서 저는 경전선 역 이름들을 쭉 훑어 내려갔습니다. 요금표와 시간을 번갈아 비교해 보면서 대충 거리를 짐작했습니다. 유수역 지나 완사역 지나 기껏 다솔사역….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외로웠던가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보고자하고 만나고자 했던 건 사람이었고, 결국엔 자신이었고, 생래적으로 모든 것이 허망해 방황하는 저의 긴 그림자였던 것 같습니다.
막막하던 이십대에 저 역시도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읽으며 어떤 알지 못할 아련함에 잠기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한숨과 서러움으로 윤후명 선생의 '협궤열차에 관한 보고서'를 읽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인생이 서럽고 안타깝고 막막하다는 것을 낡은 기차와 그 문학작품들은 일찌감치 저에게 다 가르쳐주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유수역엘 가고 싶고 기차를 타고 싶습니다. 지금 유수역 주변엔 여느 곳처럼 개망초 꽃이 한창입니다. 노란 루드베키아도 피어납니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측백나무 울타리가 부르르 몸을 떱니다. 측백나무 울타리에 박혀있던 참새 떼들이 화들짝 놀라 날아갔다 되돌아옵니다. 늙은 느릅나무의 몸은 장맛비로 시커멓게 젖어 있습니다. 만져보면 금세 손바닥에 시커멓게 묻어납니다. 저기 가화천 위로 철다리가 보입니다. 경전선 지나가는 철길입니다. 늘 저 철다리를 넘어 여수나 순천 혹은 목포에까지 가보리라 마음만 먹고 있습니다.
'유수'라는 말은 참 슬픕니다. 어쩔 수 없이 인생의 허무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조심스럽고도 작게, 그 옛날 아버지처럼 저도 노래를 불러봅니다. 노래는 목구멍에 걸려서 잘 안 나옵니다.
참, 기차 타고 대구 가는 날. 그날 밀양에서 청도로 가는 길 위에서 저는 '복숭아밭에서 온 여자'라는 시 한 편을 썼습니다. 새벽기차표를 끊을 때 군복 입은 사내 곁엔 젊은 여자를 앉히는 이상한 역무원이 있다고 썼습니다. 몸 섞지 않고도 부부가 되어 종점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습니다. 퉤, 침을 뱉듯 아침이 온다고 썼습니다. 두루마리 비닐 같은 아침 햇살이 복숭아밭을 덮는다고 썼습니다. 깨울 수도 없을 만치 깊이 잠든 싸구려 원피스 볼따구니에 밝고 환하고 고운 햇살 한 움큼이 어룽거리고 있다고 썼습니다.
흐르는 강물 같은 곳, 꽃 지고 눈물 피는…
"마음이 낡아빠질 때마다 나도 몰래 발길 가는 간이역
인생은 서럽고 먹먹한 것 일찌감치 가르쳐준 공간
거기서 새로운 시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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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역, 낙화유수역은 진주에서 승용차로 십여 분이면 갈 수 있는 아주 작고 초라한 간이역입니다. 기차역이라고도 할 수 없지요. 좀처럼 시가 안 올 때, 시를 만나기 위해 정처 없이 가는 곳, 그곳은 제 시의 간이역입니다. 제가 그곳에 갈 때는 맨발에 맨몸으로 갑니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 튀어나온 츄리닝 바지를 아무렇게나 꿰어 입고 갑니다. 슬리퍼를 신거나 운동화를 접어신고 갑니다. 그러니까 유수역은 아무런 절차도 형식도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마음마저 낡고 다 낡아빠졌을 때, 허름해졌을 때 찾아가는 곳입니다.
이곳에 오면 저는 자꾸만 '낙화유수'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그 옛날 술에 취한 아버지가 비틀비틀 부르시던 노래, 허무하고 퇴폐적이고 덧없는 노래 말입니다. 한여름 마루 끝에 누워서 아버지의 '낙화유수'를 들을 때는 마루가 끝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수역에 오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유수역은 언제나 텅 비어 있습니다. 올 때마다 유수역은 늘 유수(流水)만 있고 역사(驛舍)만 있습니다. 타고 내리는 사람 하나 없이 썰렁하기만 합니다. 갈 때마다 해가 졌고 올 때마다 밤이었습니다. 아, 딱 한 번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라 부르는 포유류들이 생래적으로 쓸쓸해하는 시각, 사위가 어두워져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창원에 사는 아들네 집엘 간다는, 보따리처럼 작은 시골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이깟 역으로 마실을 나온 마흔 중반의 사내가 할머니는 좀 의아하고 궁금하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날 어둠이 내린 조그만 역사(驛舍) 벤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거든요. 여성으로서의 경계심을 다 놓아버리고 편안해진 할머니가 저도 편안했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이렇게 역(驛)은 제겐 편안한 강물입니다. 위안의 장소입니다. 몇 년 전이었습니다. 갑자기 대구엘 가야하는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문득, 기차를 타고 대구엘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주에서 대구는 고속버스가 젤 빠른데, 기차는 빙빙 돌고 돌아서 시간이 배나 더 걸리는데 글쎄 무엇 때문에 그때 저는 기어코 기차를 타고 싶었던 걸까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제게 있어 역이란 갑자기 오는 시처럼, 덧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옵니다. 아마도 저도 모르는 제가 그걸 애타게 원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막상 검색을 해보니 진주에서 대구로 곧바로 가는 기차는 없었습니다. 삼랑진에서 갈아타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전 좋았습니다. 사실은 삼랑진에 내려야 한다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삼랑진이 유수역처럼 느껴졌거든요.
맞아요. 제겐 모든 역이 유수역이거든요. 낙동강이 있고 역사 저편에 은사시나무며 포플라나무며 큼직큼직한 나무들이 서 있는 삼랑진역도 따지고 보면 유수역입니다. 무엇보다 시를 쓰기 때문에 그날 저는 삼랑진이 고향인 오규원 선생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 밤낮으로 외우던 시 '한 잎의 여자'가 금방 떠올랐습니다. 팔랑거리며 뛰어가던 단발머리 여학생도 함께요.(히히, 제가 그때 한참 한 잎 같은 여학생을 짝사랑하고 있었거든요.)
갓 어둠이 걷히는 새벽 삼랑진역에서 저는 온갖 폼을 다 잡았습니다.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가방 속의 시집을 꺼내 읽었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셨고(웃기지요, 정말!) 역사 저쪽에서 이쪽으로 느릿느릿 왔다 갔다 했습니다. 기차시간도 넉넉해서 아직 여명에 젖어있는 삼랑진 골목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렸습니다. 참 묘했어요.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골목, 그것도 낯선 동네의 골목을 기웃거리고 다니는 느낌은요. 그것은…… 뭐랄까, 문득 낯선 시 하나를 발견하는 느낌, 새로운 시 하나를 만나는 느낌 같은 것이었어요. 그것은 야릇한 설렘 같았어요.
참, 기차역 이야기를 하니까 새삼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십 년 전쯤 IMF가 왔을 때였어요. 제가 다니는 회사도 갑자기 어려워져서 한 달에 반만 출근을 해야 했어요. 저는 잠시 양산 물금 근처로 막노동을 다녔어요. 작업복을 챙기고 장갑을 챙기고 새벽마다 그곳으로 갔어요. 물론 새벽기차를 타고 말입니다.
새벽기차는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고 분위기가 있지만, 사실은 핏발선 눈과 낯선 땀 냄새와 입 냄새로 가득 찬 기차였어요. 새벽기차는 삶이었어요. 그때, 정적과 나른함을 깨우는 소리가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우스워서 혼자 씨익 머금어보게 되는 일이었어요.
아마 함안 어디쯤이었다 생각됩니다. 다들 피곤에 지쳐 곯아떨어져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어요. 허름한 잠바 차림 중년 남자였어요. 그는 누구에겐지 알 수 없지만 휘둥그레 놀란 표정으로 "워메, 여기가 어디여이?"라고 물었어요. 곧이어 "스톱, 스톱!"이라고 소리를 질렀어요.(세상에, 기차를 타고 스톱이라니요^^.) "워메 니기미 ××, 참말로 죽겠네잉, 이 일을 어쩌면 쓰까이!"라고 그는 발을 동동 굴렀어요.
그 광경, 생각을 해 보세요. 얼마나 재밌고 웃겼던지요. 그이는 아마도 술을 한 잔 했던가봅니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곤한 몸이 술에 취해 정신없이 곯아 떨어졌던가봅니다. 밤기차를 타면 아직도 저는 그 낯선 사내가 슬그머니 생각이 납니다. 웃음을 머금어 보게 됩니다. 당황하던 전라도 사내의 사투리에 놀라 잠이 깬 승객들이 이내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던 모습도 선연하게 떠오릅니다.
진주에 내려와 처음 가보았던 가을 역 생각도 납니다. 그때 저는 차가 없었지만 무작정 어딜 가고 싶은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거든요. 어디를 갈까, 진주역 대합실에서 저는 경전선 역 이름들을 쭉 훑어 내려갔습니다. 요금표와 시간을 번갈아 비교해 보면서 대충 거리를 짐작했습니다. 유수역 지나 완사역 지나 기껏 다솔사역….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외로웠던가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보고자하고 만나고자 했던 건 사람이었고, 결국엔 자신이었고, 생래적으로 모든 것이 허망해 방황하는 저의 긴 그림자였던 것 같습니다.
막막하던 이십대에 저 역시도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읽으며 어떤 알지 못할 아련함에 잠기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한숨과 서러움으로 윤후명 선생의 '협궤열차에 관한 보고서'를 읽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인생이 서럽고 안타깝고 막막하다는 것을 낡은 기차와 그 문학작품들은 일찌감치 저에게 다 가르쳐주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유수역엘 가고 싶고 기차를 타고 싶습니다. 지금 유수역 주변엔 여느 곳처럼 개망초 꽃이 한창입니다. 노란 루드베키아도 피어납니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측백나무 울타리가 부르르 몸을 떱니다. 측백나무 울타리에 박혀있던 참새 떼들이 화들짝 놀라 날아갔다 되돌아옵니다. 늙은 느릅나무의 몸은 장맛비로 시커멓게 젖어 있습니다. 만져보면 금세 손바닥에 시커멓게 묻어납니다. 저기 가화천 위로 철다리가 보입니다. 경전선 지나가는 철길입니다. 늘 저 철다리를 넘어 여수나 순천 혹은 목포에까지 가보리라 마음만 먹고 있습니다.
'유수'라는 말은 참 슬픕니다. 어쩔 수 없이 인생의 허무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조심스럽고도 작게, 그 옛날 아버지처럼 저도 노래를 불러봅니다. 노래는 목구멍에 걸려서 잘 안 나옵니다.
참, 기차 타고 대구 가는 날. 그날 밀양에서 청도로 가는 길 위에서 저는 '복숭아밭에서 온 여자'라는 시 한 편을 썼습니다. 새벽기차표를 끊을 때 군복 입은 사내 곁엔 젊은 여자를 앉히는 이상한 역무원이 있다고 썼습니다. 몸 섞지 않고도 부부가 되어 종점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습니다. 퉤, 침을 뱉듯 아침이 온다고 썼습니다. 두루마리 비닐 같은 아침 햇살이 복숭아밭을 덮는다고 썼습니다. 깨울 수도 없을 만치 깊이 잠든 싸구려 원피스 볼따구니에 밝고 환하고 고운 햇살 한 움큼이 어룽거리고 있다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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