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이야기

콜레마이넨과 손기정의 눈물

石泉 2008. 7. 17. 10:02
[하남길 교수의 올림픽 이야기] ⑦ 콜레마이넨과 손기정의 눈물
2008-07-16 09:23
나라 잃은 설움… 통한의 金메달
 
 1912년 제5회 스톡홀름올림픽은 운영 체계가 뚜렷이 확립된 대회다.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부터 메인스타디움에 참가국의 국기가 게양되었고,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선수단이 입장을 한 이래 올림픽에서 국가주의적인 색채는 더 짙게 나타났다.

 특정 국가의 선수들은 당연히 자국의 국기를 달고 올림픽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19세기 말 신제국주의 시대 이후 많은 나라들이 다른 나라의 속령이나 자치령으로 있었고, 이들의 올림픽 참가에는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을 앞두고 오스트리오ㆍ헝가리 제국은 보헤미아(현 체코)도 오스트리아 영토이므로 한국가로 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캐나다와 호주가 영연방이므로 영국 단일팀으로 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논란 속에 IOC는 국가별 참가의 범주를 IOC가 인정하는 국내올림픽위원회가 있는 나라로 규정,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그 결정이 나라를 잃은 국민의 슬픔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1912년 제5회 스톡홀름올림픽에 플라잉 핀즈(flying Finns:나는 핀란드인)라는 별명이 붙은 장거리 선수 한명이 있었다. 콜레마이넨(Hannes Kolehmainen)이었다. 그는 육상 5000m, 1만m, 1만2000m크로스컨트리 3종목을 석권하며 세계 육상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5000m 경기에서 보여준 쟝 브왕(Jean Bouin)과의 숨막힐 듯한 선두 다툼은 수많은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콜레마이넨은 그 경기에서 종전기록을 26초6이나 단축한 14분36초6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러나 시상대에 선 그는 애써 눈물을 감춰야만 했다. 그는 4년 전 런던올림픽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톡홀름올림픽에서도 조국 핀란드 국기를 달고 달릴 수 없었다. 핀란드 국기 대신 러시아 국기가 게양되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그는 국기 게양대를 지켜보면서 싫어하는 국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이기지 말아야 했었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콜레마이넨의 절규와 슬픔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의 손기정 선수에게도 다가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선수단의 일원으로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한 우리 선수는 8명이었다. 육상 마라톤의 손기정 남승용, 농구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축구에 김용식, 복싱에 이규환, 임원 이상백 등이었다. 입상 선수는 손기정과 남승용 뿐이었다. 손기정은 마라톤에서 2시간29분19초2의 올림픽 최고기록을 작성하며 우승했고, 남승용은 2시간31분42초로 3위를 차지하여 우리 민족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마라톤 제패 소식을 접하고 '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에서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것이냐"라며 일제 강점기의 설움을 토해 냈다. 올림픽의 역사에는 찬란한 영광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제2, 제3의 콜레마이넨과 손기정의 눈물도 얼룩져 있다.

< hng5713@gnu.ac.kr 경상대학교 교수 > 협찬:스포츠토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