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진
[스크랩] 불타는 꽃무릇 (173회)
石泉
2007. 11. 23. 11:27
< 2007년 9월 22일 토요일-- 9월 23일 일요일 > 금요일 저녁에 당감동에서 계모임을 갖고 노루실로 들어갔다. 날씨가 서늘해져서 전기 장판을 꽂고 잤더니 방은 덥고 공기는 차가워서 잠을 몇 번 설쳤다. 아내도 잠을 푹 못 잤는지 일찍 잠이 깨었길래 저수지로 물안개를 보러 갔다. 먼동이 벌겋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동이 트는 하늘>
운정 저수지에 가보니 가을보다는 물안개가 적었다. 아마 아침과 낮의 일교차가 커야 물안개가 더 많이 보이는가 보다. 그래도 안개가 산허리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보니 헛걸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저수지 물속에서는 무엇이 퐁퐁 뛰기도 하고 방울이 뽀끔뽀끔 올라오기도 해서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운정 저수지>
돌아오면서 마을에 있는 꽃들을 살펴보았다. <박꽃>
<층층꽃>
<고마리 군락>
노루실 마을 어귀에는 서약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이 바로 내가 쓴 '똥쟁이, 너도 진돗개니?'라는 동화책에 나오는 '향불사'의 모델 역할을 했다. <서약사의 분꽃>
진이가 있었다면 내가 낸 책을 보여주고 고맙다는 인사를 할 텐데 지금은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 똥쟁이 이야기는 내가 직접 키운 진돗개 진이의 이야기이고 노루실에서 벌어졌던 일에 상상을 보태어 쓴 작품이다. 원래는 내가 있는 노루실을 작품의 무대로 하려고 했으나, 저학년 중편 동화 말고 장편의 무대로 삼기 위해 이번 책에서는 노루실 대신 고라리를 무대로 썼다. 집으로 돌아와서 뽕나무 밥을 호박잎으로 싸 먹고 나서 효소를 담기 시작했다. 마당에 뽑아내지 않고 키운 가마중이 몇 그루 있어서 효소 담기엔 충분했다. 가마중을 뽑아서 씻고, 병안에 설탕과 함께 넣었다. 가마중 말고 복합적인 효과를 보기 위해 털진득찰과 달맞이꽃도 같이 집어 넣었다. <가마중 줄기>
<가마중 효소>
<달맞이꽃도 넣고...>
효소를 담고 나서는 마당에 자란 풀을 뽑았다. 요즘 비가 자주 와서 풀들이 엄청나게 자랐다. 그대로 놓아두면 집이 풀 속에 폭 파묻힐 판이다. 풀을 다 뽑자면 하루가 지나도 다 못 뽑을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보이는 데만 대충 뽑고 나서 밭으로 갔다. 배추가 메뚜기와 배추벌레에 뜯어 먹혀서 시들시들했다. 올해는 할 수 없이 저농약을 몇 번 뿌리기로 했다. 어지간하면 농약을 안 치려고 했으나 메뚜기 떼가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배추가 한 포기도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농약방에서 사온 농약을 물에 타서 뿌렸다. 그런 다음에 거름을 주었다. 배추 모종을 심기 전에 거름을 뿌렸어야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모종을 먼저 심었기 때문에 늦더라도 거름을 모종 사이에 묻었다. 점심을 먹을 때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땀이 비오듯이 흘렀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도시에 가면 글 쓰거나 책을 읽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지만, 노루실에 오면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별로 피곤하지도 않다. 일을 하자면 끝이 없었다. 오늘 할 일을 다 못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오후에는 아내와 1박 2일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내 표현을 빌리자면 시골에 발목이 잡혀 아무 데도 못 간다니 한 번쯤은 아내 기분도 맞춰줘야 할 것이다. 오후 3시가 넘어서 영산 나들목을 거쳐 남해 고속도로를 탔다. 목적지는 영광과 함평. 해마다 지금쯤이면 영광 불갑사에 꽃무릇이 한창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가보고 싶어도 하도 멀어서 못 가보았는데 이번 추석 연휴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가보기로 했다. 순천과 광주를 거쳐 영광까지 가는데 차가 많이 막히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제법 걸렸다. 가는 동안에 비가 계속 내렸다. 네비게이션이 없어서 광주에서 영광을 찾아가느라 몇 번이나 물어보았다. 운전은 아내가 다 했는데 그전보다 피곤하다고 해서 나이 먹은 것을 실감했다. 옆에 탄 나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밤 6시가 넘어 영광에 도착하여 내친 김에 불갑사까지 갔더니 그 부근에 여관이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영광 군청 소재지로 나와서 여관에 들어갔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이게 웬일인가?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아침에도 또드락또드락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비가 온다고 구경을 안 할 수는 없어서 아내 친구의 조언대로 마파도 영화 촬영지인 백수 해안도로를 둘러 보았다. 비가 오니 덥지 않고 햇볕에 탈 염려는 안 해도 좋았다. 백수 해안도로에서 바라보니 바다는 부산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갯벌이 넓어서 흙밭이 많았고 바닷물도 뿌옇게 보였다. 그래서 황해라고 불렸나보다. 노을 카페가 있는 곳은 경치가 좋아서 차를 대어 놓고 정자에도 올라가 보았다. 거기서부터 내가 운전대를 넘겨 받았다. 해안 도로를 빠져 나와 불갑사를 찾아갔다. 비가 오는데도 꽃무릇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야, 정말 대단하네!" 이렇게 많은 상사화를 본 것은 처음이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역시 듣던 소문대로 굉장했다. 모처럼 마음 먹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상사화 축제를 하는 중이어서 여러 가지 행사를 하고 있었다. 추석 연휴에다 비가 와서 그런지 일요일인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불갑사 꽃무릇>
불갑사 대웅전을 들여다보니 부처님이 어느 절보다도 소박하게 모셔져 있었다. 다른 절 같으면 꽃등이나 소원을 비는 종이들이 천장에 빼곡하게 매달려 있을 텐데, 이 절에는 아무 것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요금을 받지 않았고 입장료도 거두지 않았다. 바로 이런 게 참다운 보시요, 불법을 전하는 절의 바른 자세가 아닐까? 꽃무릇이 무리를 지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이 흡사 불타는 것만 같았다. 절 이름조차 '불' 자가 들어가는 불갑사!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핀 상사화에 취하고 절의 인심에 취하여 멍한 상태로 절을 빠져 나왔다. <불타는 듯한 꽃무릇>
그 다음에는 함평에 있는 용천사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지도를 보고 쉽게 찾아갔다. 불갑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불갑사는 많이 들었지만 용천사는 내가 모르는 절이었는데, 인터넷 어느 카페에서 용천사 사진을 보고 알게 되었다. 용천사도 꽃무릇이 수두룩하게 깔려 있었다. <용천사 꽃무릇>
나는 상사화를 보면서 혼자 생각에 잠겼다. '왜 절에 상사화가 이렇게 많을까?' 스님들도 불법에 정진하려면 상사화처럼 정을 끊는 애달픈 고통을 이겨내어야 한다는 뜻일까? 잎과 꽃이 따로 피는 상사화! 잎과 꽃이 같이 피면 좋겠지만 꽃만 따로 피니 안타깝게 보인다. 다른 곳도 아닌 절에서 상사화를 보니 꽃이 아름답다는 느낌보다는 애잔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구나 봄이나 여름이 아닌 날씨가 쌀쌀한 가을에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운 것 같아 비장하게 보였다. <용천사 대웅전>
용천사에서 점심을 먹고 함평 나비 생태체험관을 찾아갔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갔는데 아주 멋진 곳이었다. 나비 표본을 체계적으로 잘 모아놓았고 볼 거리가 많았다. 온실과 화단에 수많은 꽃들이 있어서 참 보기 좋았다. 호수까지 있어서 조경도 마음에 들었다. 함평은 나비로 먹고 산다더니 그 말이 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정도라면 외국인들도 보고 좋아할 것 같다. 다른 도시들도 함평처럼 자기 고장에 맞는 특색 사업을 벌여 나가야 할 것이다. 나비 체험관을 둘러보고 함평 해수찜질을 하러 갔다. 2인용 방이 25000원이라 비싸다고 생각되었는데 막상 들어가보니 특이한 체험이었다. 해수에 유황과 숯, 쑥, 약초들을 넣은 탕이 가운데 있고 둘레는 나무 바닥이었는데 처음에 탕의 온도는 80도가 넘어보였다. 그 물에 직접 손을 담글 수가 없기 때문에 수건을 물에 적셔서 식힌 다음에 몸에 걸치는 식이었다. 가운을 입고 있어도 물이 상당히 뜨거웠다. 조금 있으니 탕안이 수증기로 가득 차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몹시 더워서 문을 빼꼼히 열어 놓고 숨을 쉬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찜찔을 하고 있으니 약물이 조금씩 식어 갔다. 찜질을 다 하려면 최소 2시간은 걸린다고 해서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궁금했는데, 약물이 식어야 탕안에 직접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우리도 2시간 반쯤 걸렸다. 약물이 식은 다음에 몸을 담갔다. 처음에는 약물에 적신 수건조차 뜨거워서 만질 수가 없었는데 이젠 몸을 담가도 괜찮았다. 나는 이럴 보고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적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화를 처음 쓸 때는 굉장이 어렵게 느껴지고 나하고는 안 맞는 것 같지만 자꾸 쓰다보면 할만 하게 된다. 살이 델 정도로 뜨겁던 물이 식어서 몸을 담글 수 있듯이 어렵게 느껴지던 글에 차츰 적응하게 되는 것이다. 난 원래 사우나와 찜질방을 싫어해서 잘 가지 않았는데 난생 처음 오래 찜질을 해보았다. 모처럼 아내 기분을 맞춰주고 내 인내심을 시험해본 해수찜질이었다. 아내는 피로했던 몸을 해수로 지지고 나니 개운하다며 좋아하였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여행이었다. 마침 가을이라 나는 여기 저기 다니면서 꽃씨 씨앗을 제법 모은 것도 적잖은 수확이었다. 과연 이 많은 씨앗 중에서 몇 개나 제대로 싹이 틀지는 모르지만 잘 말려서 노루실에 갖다 뿌릴 것이다. 구경은 구경대로 잘 하면서 씨앗까지 모았으니 완전히 일석이조의 멋진 여행이었다. 나는 씨앗을 뿌릴 땅이 있으니까 정말 좋다. (*) <씨앗 모음>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凡 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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