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그룹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공기 위를 걷는 사람들』 石泉 2008. 10. 28. 09:46 www.freecolumn.co.kr 자유칼럼그룹 2008.10.28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공기 위를 걷는 사람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라 할 만하다(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논어』에 나오는 공자 말씀입니다. 『논어』를 처음 배울 때 이 구절을 읽으며 ‘군자 되기가 쉽구나’ 했습니다. 남이 알아주든 말든 상관없다고 여길 때였지요. 지금은, 군자가 되기란 역시 어렵다고 느낍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서 슬프고 노여웠던 시간들이 그림자처럼 제 뒤에 있습니다.사람들이 털어놓는 고민의 태반은 남이 나를 ‘알지 못함(不知)’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내 능력을 알아주지 않아서, 내 고통을 알아주지 않아서, 내 진심, 내 수고, 내 의미를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하고 억울해 합니다. 그럴 때 남이 나를 모르는 건 당연하다고 얘기하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절망스런 표정으로, 그럼 쓸쓸해서 어떻게 사냐고 반문합니다. 어떻게 사느냐… 공기처럼 살면 됩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를 살리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사는 거지요.가브리엘 워커의 『공기 위를 걷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고 묵묵히 사람을 살리는 ‘공기’에 대한 책입니다. 공기에 관한 아름답고 슬프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 실린 이 책을 읽고나면, 우리의 한 호흡에 얼마나 넓은 세계가 담겨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무도 공기에 대해 관심이 없을 때 처음으로 그 속내를 궁금해 한 건 갈릴레이입니다. 교회의 탄압과 나빠진 시력 탓에 더 이상 하늘을 볼 수 없게 된 갈릴레이는, 저 높은 하늘 대신 바로 옆에 있는 공기로 눈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텅 비었다고 생각한 공기의 무게를 잽니다. 그의 실험으로 공기가 아주 무겁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집니다.(그가 얻은 값은 실제보다 두 배 정도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공기가 이렇게 무겁다면 우리는 왜 그걸 못 느낄까요? 저자는 우리가 그 무게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다 밑을 기어 다니는 바다가재가 바닷물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갈릴레이의 실험은 토리첼리와 보일을 거치면서 좀더 정교하고 정확해집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공기의 실체를 확인한 과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기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성과 혁명의 시대 18세기에, 공기는 신비의 베일을 벗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출발은 스코틀랜드의 친절한 의사 블랙이었습니다. 과학사상 보기 드물게 명예욕이 없던 블랙은 결석 치료제를 연구하다가 우연히 이산화탄소를 발견합니다. 공기의 종류가 한 가지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최초로 확인된 순간이었죠. 덕분에 블랙은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는 명예를 얻습니다. 몇 십 년 뒤, 이번엔 혁명 전야의 프랑스에서 부유한 천재 라부아지에가 이산화탄소의 짝꿍인 산소를 발견합니다. 라부아지에는 산소의 존재만이 아니라 산소가 호흡을 도우며, 그 호흡이 몸속의 영양물질을 태운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먹는 것과 숨쉬는 것은 전혀 별개라 여기던 당시에 그것은 놀라운 소식이었지요. 하지만 라부아지에가 놀란 건 다른 점이었습니다. “막노동을 하면서 사는 가난한 사람은 살기 위해 육체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야 하는데, 그 결과 부자보다 더 많은 물질을 소모하도록 강요받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살기 위해선 산소가 필요하지만 산소를 많이 마시면 그만큼 빨리 죽습니다. 따라서 산소 소비량이 많은 육체노동자는 그렇지 않은 부자보다 빨리 늙고 빨리 죽을 확률이 높지요. 라부아지에는 이처럼 공기조차 불평등하게 소비되는 현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돈도 명예도 모두 가진 부르주아였지만 인간의 평등을 보장하는 혁명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그의 믿음을 배반하고 그는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과학자로 성공하고 싶었으나 라부아지에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마라의 음모였지요. 라부아지에의 비극적 최후는 “산소의 화학이 인간의 조건”이기도 함을 보여줍니다. 즉, 활기찬 생활이 노화를 촉진하듯, 회전이 빠른 두뇌, 강한 체력, 열정적인 생활방식에는 위험이 따른다는 거지요. 그러고 보면 ‘짧고 굵게’는 산소 같은 삶의 표어인 듯도 합니다. 책의 맨 앞에는 우주에서 지구로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공군대위 조 키팅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상 32km 지점에서 뛰어내린 그는 오존층, 성층권, 대기권, 대류권을 거쳐 무사히 지구로 귀환합니다. 첨단의 보호장비 덕분이지요. 하지만 그의 머리 위에서 태양의 치명적 복사를 흡수해준 전리층이 없었다면, 아니 그 위에서 시속 160만km로 불어 닥치는 태양풍을 막아준 자기장이 없었다면 아무리 성능 좋은 여압복을 입었대도 살아날 수 없었을 겁니다. 또한 구멍이 나긴 했지만 여전히 자외선을 흡수하고 있는 오존층이 없었다면 지구에 착륙해서도 살 수 없었을 테고요. 그 모든 것 덕분에, “포근한 담요”처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공기 덕분에, 우리는 무시무시한 환경을 머리 위에 두고서도 편안히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키팅거와 라부아지에 같은 이들, 포스트, 페렐, 비르켈란, 솔로몬 등 이 책에 나오는 산소 같은 과학자들 덕분입니다. 위험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그들 덕분에 우리는 당연한 삶이 누구 덕분인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지상에서 사는 데는 선선한 미풍만이 아니라 사나운 폭풍도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공기의 보이지 않는 작용들이 있기에 삶은 지속됩니다. 공기의 존재를 모를 때도, 그 작용방식과 기능을 모를 때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기 전에 내가 혹 무엇을 모르는지, 몰라서 당연히 여기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필자소개 김이경 "취미로 시작한 책읽기가 직업이 되어 출판사 편집주간으로 일했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책을 읽고 쓰고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립도서관에서 독서회를 11년째 지도 중이며,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인사동 가는 길]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