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이야기

여전한 인생 박흥수씨 울트라 후기

石泉 2009. 4. 8. 11:30

안녕하십니까, 여전한 인생입니다.

달림이들은 꾸준하게 달려주어야 함에도, 자꾸 게을러지고, 방에서 대문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울트라 달리기를 하고 와서 망가져버렸습니다.

부산갈매기분들은 우짜든둥 꾸준하게 열심히 달리시길 바라면서, 다녀온 보고합니다. 런클 힘입니다! 

 

 

사순절을 맞아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몸소 체험하고 각자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자 하는 울트라 마라톤대회 안내에 이끌려, 연습이나 준비도 없이, 보잘 것 없는 달리기 경험에만 의존하여 대구 성지순례 울트라 마라톤대회를 다녀왔습니다.


한마디로 고해성사하겠습니다.

연습이나 준비도 없이 참가한 죄, 몇 번 울트라 마라톤을 해 보았다는 알량한 경험에 의지해 무모하게 달려든 죄, 밤이 새도록 고해하였습니다.

또한 살아오면서 지은 수없이 많은 죄, 더 낮아지지 못한 죄, 이웃과 더불어 살지 못한 죄를 사해달라고 성지를 찾아 차가운 밤과 새벽공기 속에서 간청하였습니다.

무박 2일 동안, 나와 내 마음속의 또 다른 수많은 나가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교만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보이지 못하였음을 통회하였습니다.

대회를 마친 이 순간, 비록 고해성사한 내용들을 다 잊어버리고 다시 일상적 삶속의 여전한 인생으로 되돌아왔지만, 그래도 나를 돌아볼 수 있는 나름 의미 있고 뜻 깊은 시간 여행 이였습니다.


대구 시내에서 2백여 명의 울트라 런너들과 함께 대오를 이루어 경찰차의 호위를 받고,   시민들의 환영도 받으며 팔달교까지 달려갈 때만 해도 그래도 몇 년이나 달렸는데, 달리기 한 경력이 어디 가겠어 하며 오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오만한 자신감이 사그라드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신동재를 시작으로 유학재, 기성리 고개, 한티재, 파군재와 그리고 능성재까지, 대구 북쪽의 수많은 고개들을 넘어 가면서, 내 몸이 나에게 들려주는 소리를 절실하게 들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 섣불리 장거리 달리기에 나서지 말자고 체험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매천 성당을 지나 신동재 입구까지는 기분 좋게 왔는데, 불빛 하나 없는 신동재 고개를 넘어가면서 하얗게 핀 벚꽃도 쳐다보면서 잘 왔는데, 신동읍에 들어서니 몸이 저를 자꾸 불러세웁니다. 낭패감과 열패감으로 겨우 제 1 CP인 신나무골 성지에 도착하니, 이번 대회에서 정말 고맙게 느꼈던 자원봉사자들의 정성어린 환대와 함께 떡과 음료가 반겨주어, 그 덕분으로 사그러들던 자신감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신나무골 성지라는 곳을 통해 믿음의 길을 찾아 죽음도 불사하였던 이들을 떠 올려 용기를 내어 보려고 하였지만, 작년 가을 이후 몇 달 동안 장거리주는 커녕 손가락으로 꼽을만하게 달려본 이력만으로 아무래도 무모한 도전인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생각은 그렇지만, 몸은 일단 갈 수 있는데 까지 다시 가보려고 합니다. 베네딕도 수도원을 지나서 캠프 캐롤인가요, 그 미군부대 담을 따라 돌아가니, 한밤중의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술을 마시고 힘차게 깊은 밤을 날아다니는 젊은 이방인들과, 또한 같이 어울린 우리의 젊은 처자들의 모습도 보이긴 해도 옛날의 미군부대 주변의 풍경과는 달라 보입니다.

이렇게 한밤중에 만나는 길은 고요한 시간과 장소에 놓여 있지만, 그 길이 주는 소리, 냄새, 침묵들과 만나보고 들어 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습니다. 일상사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오직 길이 주고 있는 그 길이에 대한 계측을 위해 달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문제는 몸과 마음이 함께 달려가야 되는데, 몸은 자꾸만 그만 가자고 합니다.


초반에는 마음이 무모한 것 같다고 하더니만, 이제는 몸이 신호를 보내옵니다. 왼쪽 다리의 장경인대와 무릎이 심상찮습니다. 유학재 고개를 넘으면서부터 마음도 그만두자고 유혹 합니다. 이제 겨우 마라톤 풀코스 거리까지밖에 오지 못했는데, 몇 번 해보지 않았지만 울트라 마라톤를 하면서 중도에 그만둔 적이 없었는데 하면서, 칡(葛)과 등나무(藤)가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때, 달님도 주무시려 들어가려고 할 오밤중에, 문자가 날아옵니다. 힘내라고, 파이팅이라고, 잠도 자지 않고 날려 보내준 문자의 사랑에 겨우 마음을 추스려 다부동 전쟁기념관 2 CP에서 간식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5번 국도로 진입하니, 제 주위로 아무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아무래도 후미로 처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주변은 물론 길까지 까맣습니다. 이 길이 그 길인가, 맞게 찾아 가는지 몰라 배낭안의 비상연락망을 꺼내 보려고 하지만, 배낭 벗기도 귀찮습니다.

 

잘못 든 길이라면 그 핑계로 포기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는데, 저 앞에서 고마운(?) 자원봉사자가 기성리 고개 길을 안내해 줍니다. 더불어 감사한(?) 멘트를 날려주는데, 기성리 고개보다 한티재 고개 길이 더 힘들거랍니다. 그렇습니다. 한티재 올라가다가 몇 번이나 되돌아 내려갈까 유혹에 이끌렸습니다. 어차피 한티성지에서 체크하고 다시 내려와야 하니까요.


바람 씽씽 불고, 캄캄한 검은 밤길에서, 한티성지로 올라가는 고개 길에서, 나는 나의 깊은 심연(深淵)을 만나고, 추억을 만나고, 회상도 만납니다. 그리고 나를 감싸고 도는 낯선 외로움과 고요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도 만납니다. 그리고 이미 3 CP에서 체크하고 다시 내려오는 선행 주자들과도 만납니다. 나도 준비만 좀 했더라면 저기에 있을 터인데,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고해해봤자 소용 없었습니다.

 

통증으로 불편한 왼쪽다리를 이끌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든 삶과 권태로울 정도로 안락한 삶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견디기 힘들까 생각을 해 보면서, 성지순례길이니만큼 한티성지 제 3 CP까지는 가야겠다며 한발 한발 걸어 올라갑니다. 식사장소인 따뜻한 실내에 들어서니 왼쪽다리 통증이 심합니다. 목적지까지의 남은 시간과 거리도 재어보며, 과연 시간내 골인할 수 있을까를 따져보니 애매하고 불투명합니다. 관둬, 갈까, 또 한번 갈등을 느낍니다.

자원봉사자들은 뭐라도 하나 더 해줄 수 없을까하며 기진맥진한 주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를 씁니다. 진통제 있냐니까, 금방 하나 구해줍니다. 일단 먹었습니다. 다시 가보려고요.


남은 거리 40킬로와 남은시간을, 조금 여유를 두고서 10킬로 단위로 배분하고 출발하려고 밖으로 나오니, 쌩하고 바람이 가지 말라고 길을 막아섭니다. 순간 멈짓했지만, 언젠가 읽었던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어디에서 봤는지 잘 모르겠지만, 메모해 두었던 것을 옮겨봅니다. 천재음악가 모차르트와 같은 시기의 음악가 살리에르 증후군 관련 글이지 싶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처음 같은 열정을 갖고 사람들과의 조화 속에서 꾸준히 노력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게 된다. 어쩌면 재능을 타고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 일지도

모른다. ‘나’와의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끝까지 이겨내고야 마는 끈기, 이것이야말로 질투할만한 대상이 아닐까? 오늘날의 천재는 재능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세월에 무릎 꿇지 않는 ‘열정’을 타고 나는 자라고 칭하고 싶다. 오늘도 땀 흘리며 사회를 유지해 나가는 수많은 살리에르들에게 위로를....“  


조명을 받는 것과 조화를 이뤄내는 것 중, 그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비록 1등은 아니지만, 제한시간 내에 완주하려는 노력이 이번 울트라대회와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냥 달려봅니다. 진통제 덕분인지 초반처럼 잘 달릴 수 있었습니다.

점점 날이 밝아오는 가운데, 차가운 새벽공기이지만 방풍잠바도 벗고 지묘동의 파계교까지 긴 주로를 혼자서 뛰었습니다. 오, 주님 무모한 도전임을 고해합니다. 도와주소서 하고요....


파군재 삼거리쯤 와서 시간과 거리를 확인해보니, 특별한 변수가 없으면 충분할 것 같아  그곳에서 만난 서울 가마동 주자 한분과 공산터널 언덕을 넘고 능성재까지 동행하였습니다.중간에 앞서 가던 주자들과 가끔 만나는 것을 보니 후미는 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해가 뜨고 따사로운 봄바람도 불어오지만, 다시 왼쪽다리에 통증이 찾아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어떻게 될지 몰라 능성재 정상에서 동행하던 분과 헤어져 다시 혼자 달리고, 걷고 해봅니다. 동강삼거리에서의 마지막 자원봉사자로부터 과일과 물을 제공받고 남은 5킬로를 다리를 절며 가는데, 동행하다가 뒤처졌던 가마동 주자분도 다시 앞서가고, 뒤에 따라오는 다른 주자들도 앞서 지나가지만, 금방 닿을 것 같았던 남은 5킬로가 어찌나 그리 멀고도 먼지요...

 

제한시간 30분쯤을 남기고 대구 가톨릭 대학 후문에 도착하여 운동장의 골인지점에 들어서서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피흘려 돌아가시면서 하신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듣는 것 같았다면 엄청난 오버인 것 맞죠(^^)


다시 또 울트라 마라톤을 통해 새로운 길 하나를 익혔지만, 이제는 자꾸 길(路)에서 길(道)을 찾아 밤새도록 깊은 밤을 날아서, 아침에 해가 뜨면 새로이 영접하는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자꾸 약해짐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길 위에 서 있는 동안은 나는 세상의 일부가 되고, 길 위에서는 자유로운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번 대회를 통해 다시 한번 더 몸이 전하는 소리를 충분하게 들어야 함을 느꼈습니다.


“Listen to your body, Eat right and Run safe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