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6년 출간된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는 소인국 릴리푸트 주민 한 명이 늘 시계를 보자 "난쟁이가 믿는 신(神)은 시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성직자이기도 했던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가 책을 낸 당시는 이미 '속도 바이러스'가 광범위하게 유포된 시기였고 스위프트는 이런 구절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이 시간에 묶여있음을 꼬집었다.
그 이전 농업사회는 느림의 전통이 지배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로마에서 보낸 편지가 파리에 도착하려면 빨라야 열흘이 걸렸고 이 속도는 수백년 뒤에도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중세후기부터 시간에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5-16세기 상공업 발달기에 도시마다 주민수가 늘고 농업과 상공업간의 노동분배가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좁은 지역에서 서로 협력할 수 밖에 없었고 시간이라는 개념이 더 중요해졌다.
"돈의 속성은 자연과는 반대로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줄을 몰랐다. 상인은 상품을 빨리 운송해 신속하게 판매해 시간을 절약했을 때 얻는 재정적 이익에 대해 알고있었다. 이자에 관한 논쟁은 시간을 물질로 바꿨다"
독일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사회사와 경제사를 가르치는 페터 보르샤이트가 쓴 '템포 바이러스'(들녘 펴냄)는 '속도'라는 바이러스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게 됐는지를 훑은 책이다.
속도 바이러스의 야누스적인 양면성은 책 전체에 걸쳐 계속 다뤄진다. 저자는 지금은 최고의 선(善)으로 여겨지는 속도 바이러스에 대해 "속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엄청나게 집중해야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바로 상처나 피해를 입었다"고 지적한다.
중세 말기부터 고개를 내민 속도 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활동 속도를 높인 시기는 1800년께부터로 구분됐다. 증기기관과 방적기ㆍ방직기의 탄생, 전기신호를 이용한 통신, 엔진의 성능을 향상시킨 탈것들의 발달도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났다.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본 뿌연 광경을 화폭에 담은 1844년작 유화 '비와 수증기, 그리고 속도-위대한 서부기차'에서 당시 사람들이 느끼던 속도감을 적절하게 묘사했다.
이미 당시의 속도에 어지럼증을 느낀 프랑스의 시인이자 정치가 알퐁스 드 라마르틴느는 "시간의 속도가 거의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므로 더 이상 역사를 쓰는 일이 불가능해졌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1869년 사망하기 직전에 19세기를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야만이 지배하던 그 시대에, 증기력으로 움직이면서 철로 위를 달려가는 육중한 기차에 몸을 싣고, 한 시간만에 10-20마일의 거리를 돌파하는 여행객들은 그 빠른 기관차에 대해서 우습게도 자부심을 느꼈다"
19세기와 20세기를 넘어서던 시기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격렬하게 흔들어놓고 참기 힘든 한계까지 내몰았던 원인은 전화였다. 1902년 지멘스가 베를린에 설립한 전화국 가운데 한 곳에서 라인결함이 생겨 잘못 연결된 통화들이 늘어나고 통화량이넘쳐나자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갑자기 여자 교환원이 통화 교환 장비를 머리에서 벗어던지더니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 발작은 삽시간에 전염됐다. 잠시 후 큰 교환실 전체는 소리지르고 울부짖는 여자들로 가득찼다"
저자는 "정보를 가속화하려는 기술혁신에서 드러나는 매혹적인 점은, 그것이 바로 집단적인 행복감, 즉 진보에 대한 집단적인 희열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면서도 바로 이 시기에 일상생활에서도 조급하게 서두르는 현상이 늘어났고 여기저기서 신경쇠약의 문제가 다뤄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책은 서양문명에서 속도 바이러스가 세력을 키워나간 역사를 훑어내리는 동시에스포츠와 예술, 전쟁무기, 교통사고 등 세부 분야에도 돋보기를 들이댔다.
스포츠계의 신기록 경쟁, 자동차 업계의 엔진성능 향상 경쟁, '속도감 있는' 붓질로 그려낸 근대 인상파의 그림과 현대사진, 영화, 건축, '산업합리화'의 거죽을 뒤집어 쓰고 등장한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 '가사노동 합리화'를 기치로 내건 가전제품, 자동차 운전자의 요구에 맞춘 드라이브 인 레스토랑 등이 주요사례다.
저자는 서문에서 "책의 의도는 가속화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책 구석구석에는 속도 바이러스가 세상의 규범과 가치관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우려가 역력하다.
최소한 이 두툼한 책을 읽을 때는 속도 바이러스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할 듯하다.
속도 바이러스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고 숨통을 조여왔는지를 시간 순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설명하면서도 곳곳에 중세와 근현대의 생생한 풍속을 꼼꼼하게 녹여넣고 생각할 거리들을 던진다. 그래서 책은 '속도'라는 단어를 앞세워 풀어낸 작은 문화사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두행숙 옮김. 560쪽. 2만7천원.
연합뉴스
인간은 어떻게 속도 바이러스에 감염됐나 '템포 바이러스' 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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