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이곳] <12> 시인 김언 조방앞 그리고 동천
도시의 추한 속살도 삶의 기꺼운 진실
새벽 산책길에서 본다 비로소 얌전해진 뒷골목과
영혼을 천천히 쓰다듬는 검고 탁한 저 물길…
이윽고 새로 태어나는 나
어떤 글이든 첫 문장을 떼기가 가장 힘들다. 적어도 내게는 첫 문장의 첫 구절을 떠올리는 게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다. 이것이 뚫리지 않고서는 내내 미로를 맴돌다 허탕을 치고 만다. 아예 진입을 못하는 글쓰기. 도무지 입구를 모르는 문 밖의 불청객은 그래서 사방이 벽이라는 사실만 절감하고 돌아서고 만다.
어느 벽이라도 좋다. 그것이 문으로 돌변할 때까지 다시 돌아와서 기웃거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열리는 생각. 혹은 문장. 마감에 쫓길 때는 억지로 벽을 파내고 몸을 비집고 들어갈 때도 있지만 역시나 생채기가 많이 나고 곳곳에서 군더더기가 따라붙는다. 부스럼처럼.
아무리 긁어봐야 그것은 좋은 글이 되지 못하고 시는 더더욱 못된다. 아무리 주문을 외워봐야 문은 다른 곳에서 다른 식으로 열린다. 그러니 한 바퀴 더 돌고 돌아오자. 한 바퀴만 더 돌고 돌아오면 문이 열릴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걸음을 뗀다. 떼고야 만다.
몇 걸음만 떼도 집 밖이고 몇 발자국만 더 움직여도 철옹성을 벗어나는 듯한 느낌. 사방이 꽉 막힌 이곳이 사방이 뻥 뚫린 저곳으로 변신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공간만 살짝 바꿔주어도 마음이 바뀐다. 마음을 바꾸는 데는 실제로 몸을 바꾸는 것만큼 유용한 방법도 없다.
마음을 바꾸기 위해 멀리 갔다 오면 여행이고 가까이 근처를 맴돌다 오면 그것이 산책이다. 어디를 가든 몸이 움직인다. 몸이 걷고 있고 장소가 움직이고 있다. 몸과 마음과 장소가 하나의 덩어리처럼 돌아다닐 때 나는 그것을 콕 집어 무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배경이면서 주인공이고 주인공이면서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을 만나면서 우리는 달라진다. 사건들이 많을수록 얘기는 풍부해진다. 때로는 소설이 되거나 때로는 시가 되어야 할 그 얘기들이 가장 많이 쌓인 곳을 고르라면 나는 한동안 망설일 것이다. 고르고 또 골라도 튀어나오는 장소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장소.
되도록 이곳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이곳으로부터 먼 곳에서 얘기를 찾아내고 싶었지만 그 얘기조차 이곳을 거치지 않고서는 쉬이 말문을 트지 못한다.
이곳은 우리 동네. 이곳은 조방앞이라 불리는 한밤중의 번화가. 대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삼십 년 가까이 살을 붙이고 살아온 곳. 나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고스란히 담고서 늙어가는 동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 본적을 여기로 옮겨왔음에도 여전히 이방인처럼 걸어다니는 곳. 이 모순투성이 동네를 말하기 위해선 우선은 차분해져야 한다. 한밤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이 동네의 난폭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전에.
대학 때 용호동에 살던 어느 여자 후배는 우리 동네가 너무 무섭다고 말했다. 범일동 지하철역에서 내려 용호동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려면 어쩔 수 없이 조방앞을 관통해야 하는데, 네온사인과 주점과 취객과 호객꾼들이 구분 없이 섞이고 빛나는 이 동네의 길은 밤이 깊어갈수록 질퍽해지고 언성이 높아진다. 도로마다 흥건한 그림자가 쌓인다.
싸우는 사람도 많고 얻어맞는 사람도 많고 엎어져서 자는 사람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그러니 그 후배가 두려워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경기가 예전 같지 않은 지금도 그런 살풍경은 섭섭지 않게 보인다.
사건사고가 많은 이 동네의 불야성도 새벽을 지나면서 조용히 그 이빨을 감추고 숨어든다. 어디 이 동네뿐일까. 번화가를 낀 모든 도시의 풍경이 가장 온순한 발톱을 드러내는 순간이 바로 새벽이다. 불과 한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흥청망청하던 그 거리가 말끔히 비워지는 순간이다.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두들 도시를 버리고 떠난 것 같다. 한두 시간 사이에 이렇게도 버려지기 좋은 장소로 전락해버리는 곳. 그곳이 번화가이며 또 우리 동네이다.
덕분에 이 동네를 가장 산책하기 좋은 시간도 새벽에 몰려 있다. 이 시간에 나가면 술집으로 빽빽한 빌딩도 우두커니 선 가로수처럼 얌전해 보인다. 불 꺼진 네온사인 간판도 침묵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 많던 사람도 자동차도 손에 꼽을 만큼 띄엄띄엄 보인다. 덕분에 내가 하루 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도시를 체험하는 순간도 새벽에 몰려 있다.
'그 새벽의 전혀 다른 도시를 보여줄 것.' 거의 다짐처럼 들리는 이 목소리는 두 번째 시집 '거인'의 어느 귀퉁이에서 튀어나온 말이고 새벽을 걷다가 문득 건져 올린 말이다. 새벽에는 왜 도시가 공원처럼 잠잠해지는가. 공원보다 오히려 더 조용해지는가. 나무마다 새들이 잠을 깨는 시간에 도시는 비로소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나는 걷는다. 동네를 걷고 동네 주변의 공원을 걷고 뒷골목을 걷고(컴컴한 도시의 뒷골목도 이때만큼은 안전하다) 그리고 강변을 걷는다.
강변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강이 아니다. 도시의 뒷물이 모여서 흐르는 곳. 이름하여 동천. 혹은 '똥천'이라고 부르는 이 탁한 물길의 주인공은 새벽에도 나를 받아주고 아침에도 나를 비춰주며 한밤중에도 변함없이 걷고 있는 내 얼굴을 시커멓게 반사한다. 그것도 강이라고. 그것도 물이라고 컴컴한 밤 공기를 따라 흐르는 이 방랑하는 영혼을 잔잔히 위로하는 것이다.
누군들 성공하고 싶지 않을까. 누군들 위로받고 싶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다 각박하고 다 가엾은 존재들이 끝에 가서는 냄새 나는 오물밖에 되지 않는 운명을 누군들 거스를 수 있을까.
동천에 오면 모든 게 떠내려간다는 것을 다시 실감한다. 앞으로의 운명을 바꿔보겠다는 세찬 다짐도 그 다짐을 부질없게 만드는 허한 생각도 물끄러미 떠내려가는 물살 앞에서는 모두가 한 통속이다. 검은 물살이 말한다. 모든 색깔을 다 뒤집어쓴 그 색깔이 다시 말한다. 생명도 검고 죽음도 검다.
그러면 모든 빛깔을 다 집어삼킨 빛깔이 다시 말한다. 생명도 안 보이고 죽음도 안 보인다고. 어느 작가의 말처럼 안 보이는 것이 새삼스레 다시 보이는 것이 밤이다. 낮의 삶에 익숙한 생활인들이 종종 잊어버리고 사는(잊어버리고 살아야 마음 편한) 밤의 빛깔. 그것은 검은가 싶으면 어느새 환하다. 환하다 싶으면 다시 밤이다.
켜켜이 쌓인 밤의 속살. 그 눈부신 검정을 지나면서 나의 감정도 조금씩 변한다. 멀리 갔다 오든 가까이 산책을 하고 오든 감정은 매일같이 여행을 떠난다. 산책하기 좋은 새벽에도 떠나고 아침에도 돌아다니며 저녁을 지나 한밤중에도 그 여행은 멈추지 않는다. 그래, 나는 어디든 돌아다닐 태세였다.
언제든지 이별할 태세였고 무엇이든 안녕할 태세였고 깨알같이 써놓은 그 글자들이 하나씩 무리를 이루어갈 때 떠내려가는 것. 그것이 시라고 생각했고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여행지는 오늘밤에도 쉬지 않고 흐른다.
쉬지 않고 떠내려가는 그 동천을 나는 다 말하지 못했다. 맑은 날이면 아침이고 저녁이고 갈매기가 날아와서 몇 바퀴를 돌다 가는 곳. 바다가 가까운 이 도시하천은 떠내려가는가 싶으면 어느새 멈추어 있고 고인 물살이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 역류할 때도 있다. 단순히 떠내려간다는 인상을 단숨에 뒤집는 신기한 현상을 나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생각이 없다.
아마도 바닷물이 들고나는 탓에 생긴 현상이겠지만, 그보다 먼저 한없이 가라앉았다가 한없이 흘러 넘치는 이 감정의 기복을 어딘가에 의탁할 장소로 찾는 것이 동천이라는 사실만 매번 확인할 뿐이다. 바다는 거대하고 나는 나만 생각해도 언제나 벅차다.
이 때문에 사물이 보이지 않고 사건이 보이지 않고 결국엔 내가 보이지 않는다. 유령이 되는 순간은 꼭 죽어야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에도 유령은 찾아온다. 내 감정에 짓눌려서 내가 사라져버릴 때 다른 모든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 유령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아무리 걸어도 유령을 걷어낼 수 없는 삶이 다시 동천을 찾는다. 아마도 영원히 다 말할 수 없는 이 하천에서 수시로 수면을 비집고 올라오는 기포. 수위가 낮아지면 더께처럼 껴 있는 콘크리트 벽면의 하수 자국들. 천변의 하늘을 덮고 가는 육중한 고가도로와 그 기둥들.
내가 나를 의탁할 장소가 여기라는 사실과 여기밖에 없다는 체념이 뒤섞여 흐르는 곳. 동천을 떠나면서 나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된다. 밤에도 태어나고 새벽에도 다시 태어나는 그가 홀가분해 보이는가? 강물은 말이 없다.
도시의 추한 속살도 삶의 기꺼운 진실
새벽 산책길에서 본다 비로소 얌전해진 뒷골목과
영혼을 천천히 쓰다듬는 검고 탁한 저 물길…
이윽고 새로 태어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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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벽이라도 좋다. 그것이 문으로 돌변할 때까지 다시 돌아와서 기웃거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열리는 생각. 혹은 문장. 마감에 쫓길 때는 억지로 벽을 파내고 몸을 비집고 들어갈 때도 있지만 역시나 생채기가 많이 나고 곳곳에서 군더더기가 따라붙는다. 부스럼처럼.
아무리 긁어봐야 그것은 좋은 글이 되지 못하고 시는 더더욱 못된다. 아무리 주문을 외워봐야 문은 다른 곳에서 다른 식으로 열린다. 그러니 한 바퀴 더 돌고 돌아오자. 한 바퀴만 더 돌고 돌아오면 문이 열릴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걸음을 뗀다. 떼고야 만다.
몇 걸음만 떼도 집 밖이고 몇 발자국만 더 움직여도 철옹성을 벗어나는 듯한 느낌. 사방이 꽉 막힌 이곳이 사방이 뻥 뚫린 저곳으로 변신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공간만 살짝 바꿔주어도 마음이 바뀐다. 마음을 바꾸는 데는 실제로 몸을 바꾸는 것만큼 유용한 방법도 없다.
마음을 바꾸기 위해 멀리 갔다 오면 여행이고 가까이 근처를 맴돌다 오면 그것이 산책이다. 어디를 가든 몸이 움직인다. 몸이 걷고 있고 장소가 움직이고 있다. 몸과 마음과 장소가 하나의 덩어리처럼 돌아다닐 때 나는 그것을 콕 집어 무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배경이면서 주인공이고 주인공이면서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을 만나면서 우리는 달라진다. 사건들이 많을수록 얘기는 풍부해진다. 때로는 소설이 되거나 때로는 시가 되어야 할 그 얘기들이 가장 많이 쌓인 곳을 고르라면 나는 한동안 망설일 것이다. 고르고 또 골라도 튀어나오는 장소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장소.
되도록 이곳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이곳으로부터 먼 곳에서 얘기를 찾아내고 싶었지만 그 얘기조차 이곳을 거치지 않고서는 쉬이 말문을 트지 못한다.
이곳은 우리 동네. 이곳은 조방앞이라 불리는 한밤중의 번화가. 대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삼십 년 가까이 살을 붙이고 살아온 곳. 나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고스란히 담고서 늙어가는 동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 본적을 여기로 옮겨왔음에도 여전히 이방인처럼 걸어다니는 곳. 이 모순투성이 동네를 말하기 위해선 우선은 차분해져야 한다. 한밤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이 동네의 난폭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전에.
대학 때 용호동에 살던 어느 여자 후배는 우리 동네가 너무 무섭다고 말했다. 범일동 지하철역에서 내려 용호동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려면 어쩔 수 없이 조방앞을 관통해야 하는데, 네온사인과 주점과 취객과 호객꾼들이 구분 없이 섞이고 빛나는 이 동네의 길은 밤이 깊어갈수록 질퍽해지고 언성이 높아진다. 도로마다 흥건한 그림자가 쌓인다.
싸우는 사람도 많고 얻어맞는 사람도 많고 엎어져서 자는 사람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그러니 그 후배가 두려워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경기가 예전 같지 않은 지금도 그런 살풍경은 섭섭지 않게 보인다.
사건사고가 많은 이 동네의 불야성도 새벽을 지나면서 조용히 그 이빨을 감추고 숨어든다. 어디 이 동네뿐일까. 번화가를 낀 모든 도시의 풍경이 가장 온순한 발톱을 드러내는 순간이 바로 새벽이다. 불과 한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흥청망청하던 그 거리가 말끔히 비워지는 순간이다.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두들 도시를 버리고 떠난 것 같다. 한두 시간 사이에 이렇게도 버려지기 좋은 장소로 전락해버리는 곳. 그곳이 번화가이며 또 우리 동네이다.
덕분에 이 동네를 가장 산책하기 좋은 시간도 새벽에 몰려 있다. 이 시간에 나가면 술집으로 빽빽한 빌딩도 우두커니 선 가로수처럼 얌전해 보인다. 불 꺼진 네온사인 간판도 침묵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 많던 사람도 자동차도 손에 꼽을 만큼 띄엄띄엄 보인다. 덕분에 내가 하루 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도시를 체험하는 순간도 새벽에 몰려 있다.
'그 새벽의 전혀 다른 도시를 보여줄 것.' 거의 다짐처럼 들리는 이 목소리는 두 번째 시집 '거인'의 어느 귀퉁이에서 튀어나온 말이고 새벽을 걷다가 문득 건져 올린 말이다. 새벽에는 왜 도시가 공원처럼 잠잠해지는가. 공원보다 오히려 더 조용해지는가. 나무마다 새들이 잠을 깨는 시간에 도시는 비로소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나는 걷는다. 동네를 걷고 동네 주변의 공원을 걷고 뒷골목을 걷고(컴컴한 도시의 뒷골목도 이때만큼은 안전하다) 그리고 강변을 걷는다.
강변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강이 아니다. 도시의 뒷물이 모여서 흐르는 곳. 이름하여 동천. 혹은 '똥천'이라고 부르는 이 탁한 물길의 주인공은 새벽에도 나를 받아주고 아침에도 나를 비춰주며 한밤중에도 변함없이 걷고 있는 내 얼굴을 시커멓게 반사한다. 그것도 강이라고. 그것도 물이라고 컴컴한 밤 공기를 따라 흐르는 이 방랑하는 영혼을 잔잔히 위로하는 것이다.
누군들 성공하고 싶지 않을까. 누군들 위로받고 싶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다 각박하고 다 가엾은 존재들이 끝에 가서는 냄새 나는 오물밖에 되지 않는 운명을 누군들 거스를 수 있을까.
동천에 오면 모든 게 떠내려간다는 것을 다시 실감한다. 앞으로의 운명을 바꿔보겠다는 세찬 다짐도 그 다짐을 부질없게 만드는 허한 생각도 물끄러미 떠내려가는 물살 앞에서는 모두가 한 통속이다. 검은 물살이 말한다. 모든 색깔을 다 뒤집어쓴 그 색깔이 다시 말한다. 생명도 검고 죽음도 검다.
그러면 모든 빛깔을 다 집어삼킨 빛깔이 다시 말한다. 생명도 안 보이고 죽음도 안 보인다고. 어느 작가의 말처럼 안 보이는 것이 새삼스레 다시 보이는 것이 밤이다. 낮의 삶에 익숙한 생활인들이 종종 잊어버리고 사는(잊어버리고 살아야 마음 편한) 밤의 빛깔. 그것은 검은가 싶으면 어느새 환하다. 환하다 싶으면 다시 밤이다.
켜켜이 쌓인 밤의 속살. 그 눈부신 검정을 지나면서 나의 감정도 조금씩 변한다. 멀리 갔다 오든 가까이 산책을 하고 오든 감정은 매일같이 여행을 떠난다. 산책하기 좋은 새벽에도 떠나고 아침에도 돌아다니며 저녁을 지나 한밤중에도 그 여행은 멈추지 않는다. 그래, 나는 어디든 돌아다닐 태세였다.
언제든지 이별할 태세였고 무엇이든 안녕할 태세였고 깨알같이 써놓은 그 글자들이 하나씩 무리를 이루어갈 때 떠내려가는 것. 그것이 시라고 생각했고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여행지는 오늘밤에도 쉬지 않고 흐른다.
쉬지 않고 떠내려가는 그 동천을 나는 다 말하지 못했다. 맑은 날이면 아침이고 저녁이고 갈매기가 날아와서 몇 바퀴를 돌다 가는 곳. 바다가 가까운 이 도시하천은 떠내려가는가 싶으면 어느새 멈추어 있고 고인 물살이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 역류할 때도 있다. 단순히 떠내려간다는 인상을 단숨에 뒤집는 신기한 현상을 나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생각이 없다.
아마도 바닷물이 들고나는 탓에 생긴 현상이겠지만, 그보다 먼저 한없이 가라앉았다가 한없이 흘러 넘치는 이 감정의 기복을 어딘가에 의탁할 장소로 찾는 것이 동천이라는 사실만 매번 확인할 뿐이다. 바다는 거대하고 나는 나만 생각해도 언제나 벅차다.
이 때문에 사물이 보이지 않고 사건이 보이지 않고 결국엔 내가 보이지 않는다. 유령이 되는 순간은 꼭 죽어야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에도 유령은 찾아온다. 내 감정에 짓눌려서 내가 사라져버릴 때 다른 모든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 유령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아무리 걸어도 유령을 걷어낼 수 없는 삶이 다시 동천을 찾는다. 아마도 영원히 다 말할 수 없는 이 하천에서 수시로 수면을 비집고 올라오는 기포. 수위가 낮아지면 더께처럼 껴 있는 콘크리트 벽면의 하수 자국들. 천변의 하늘을 덮고 가는 육중한 고가도로와 그 기둥들.
내가 나를 의탁할 장소가 여기라는 사실과 여기밖에 없다는 체념이 뒤섞여 흐르는 곳. 동천을 떠나면서 나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된다. 밤에도 태어나고 새벽에도 다시 태어나는 그가 홀가분해 보이는가? 강물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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