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이곳] <10> 소설가 정태규 진주 남강다리
유년의 추억 물들인 곰살맞은 정경들
토요일 오후 혼자걷는 다리
소리없이 흐르는 강물
이토록 아름다운 구도라니…
강은 들판을 적셔 풍족하게 하지만 또한 강은 이쪽과 저쪽을 단절시켜 고립시키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늘 그 단절과 고립을 넘어서 이쪽과 저쪽을 소통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가져 왔다. 그 소통의 수단으로 나루와 배가 생겼고 나아가 다리가 생겼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진주에 가면 '배다리', '배건너'라는 말이 아직도 쓰이고 있다. '배다리'는 배를 다리의 교각 대신으로 삼고 그 위에 상판을 얹은 임시 다리를 뜻한다. 1920년대에 남강에 만들어졌다가 몇 년 후에 '남강다리'가 생겨 없어진 다리지만 80년이 지난 지금에도 '배다리'는 진주 사람에게 친숙한 단어이다. '배건너'는 그 배다리를 건넌 저쪽을 의미한다. 진주 사람들은 지금도 강 건너 저편을 서로 '배건너'라고 지칭한다. '강 건너'도 아니고 '다리 건너'도 아닌 '배건너'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아련한 유년의 추억과 함께 곰살맞은 정감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중학교 삼 년 동안을 꼬박 남강다리를 통해 '배건너'를 건너다녔다. 봉래동에 있는 집에서 학교가 있는 칠암동까지 걸어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 시내 버스가 있긴 했지만 버스를 탄 기억은 별로 없다. 십리 가까이 되는 그 길을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내내 걸어 다녔던 것 같다. 공휴일을 제외하곤 나는 꼭 하루에 두 번씩 남강다리를 건너다녔던 셈이다. 내가 다리란 말을 들으면 언제나 자동적으로 그때의 남강다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 것은 그런 덕분일 것이다. 그때 함께 남강다리를 건너다녔던 친구들의 이름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남강다리가 내 유년의 기억 속에 아주 튼튼한 교각을 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등·하굣길은 힘들었다. 그 길은 진주 시내 이쪽 끝에서 배건너 저쪽 끝까지를 관통해야 하는 먼 길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고집스레 그 길을 걸어다녔다. 버스를 타면 몇 분 걸리지도 않았고, 차비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 힘든 길을 걸어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마도 남강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매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시내 길을 빠져나와 다리 입구에 이르면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졌다. 시야가 갑자기 탁 트이고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왔다.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강 밑바닥의 모래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피라미들이 보일 지경이었다.
"저게 뭐야? 저게 뭐야?"
장난기가 발동한 우리는 난간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며 굉장한 걸 본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가 모여서 있는 난간 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건너편 보도를 걷던 어른들까지 차도를 위험스레 건너서 달려왔다.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중에는 다리를 건너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있는 난간 쪽으로 몰려와 무슨 일인가 하고 다리 아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살펴보곤 했다. 그때쯤이면 우리들은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와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난간 아래엔 늘상 그대로 강물이 흘러 갈 뿐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작당을 하여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그런 장난질도 좋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한 것은 혼자서 다리를 건너는 일이었다. 특히 토요일 오후 호젓하게 혼자서 다리를 건널 때 나는 종종 다리 한가운데 난간에 기대서서 강물의 상류와 진주성과 촉석루를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오월의 햇살이라도 비출라치면 소리 없이 흘러가는 강 물결은 은어 비늘처럼 반짝였다. 성터 숲은 신록으로 물들어가고 잎새들은 가벼운 바람에 일제히 몸을 뒤척였다. 그 숲 사이로 날아갈 듯 솟아 있는 촉석루의 처마는 고운 한복 차림을 한 여인네의 어깨선을 닮아 있었다. 그 숲과 촉석루가 푸른 강물 위에 거꾸로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풍경, 햇빛과 강물과 숲과 누각이 자아내는 그 아름다운 구도는 나를 행복하게 했다. 내가 살아 있어 그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하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라고 노래한 변영로의 시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것은 그때 내가 다리 위에서 진주성을 바라보며 곧잘 읊조렸던 시일 뿐만 아니라, 그 시의 궁극적 의미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구절이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는 듯 해서이기도 하다. 그 시를 속으로 읊조릴 때면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 풍경이 가져다 주는 행복감을 표현한답시고 되지도 않은 시를 몇 편 끄적거렸던 기억도 있다.
그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던 것 같다. 강과 숲과 햇빛에 대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나 자신과 인간에 대해서. 나는 실상 그때 공부나 책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그 풍경에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에 빠져든 것도 그즈음의 일인 것 같다.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을 성서처럼 끼고 살았다. 나 자신이 한스가 된 것도 같고 데미안이 된 것도 같았다. 나는 그렇게 남강다리를 건너다니며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에 부모님의 걱정과 질책에도 불구하고 공부보다 문학과 예술에 더 심취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출발점이 바로 남강다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강은 흔히 고을과 고을을 나누어 그 경계를 이룬다. 또한 강은 사람과 사람을 나누어 이별하게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루에서의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와 시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고대가요 '공무도하가'나 고려가요 '서경별곡'이나 정지상의 한시 '송인' 등도 강에서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하다못해 유행가 '눈물 젖은 두만강'도 떠나는 님을 목 놓아 부르고 있지 않은가. 강은 또한 차안과 피안, 삶과 죽음을 나누는 경계이기도 하다. 기억과 망각 사이를 흐르는 레테강과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요단강이 그러하다. 강이 이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를 나누는 것이라면, 그 강기슭에 서서 서로의 '배건너'를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고 잃어버린 과거를 그리워하고 죽음의 세계로 떠나버린 지인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은 만남과 소통을 소망한다. 그 소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람들은 강 위에 다리를 놓는다. 그래서 다리는 고을과 고을을 이어주고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하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어린 중학생을 만나게 해준다. 자아와 타자, 자아와 세계를 소통시키고 연락케 한다. 또한 그것은 차안과 피안을 만나게 하여 인간을 초월케 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에 더 많은 다리들이 생겨 보다 풍성한 만남과 공감이 생겨난다면 우리 삶도 살아볼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남강다리를 걸어서 건넌다. 이제 남강다리는 현대식으로 고쳐져 옛모습을 잃었다. 새로운 다리가 아무리 날렵하고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서 있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내 중학교 시절의 남강다리를 사랑한다. 좁은 보도와 낮은 난간을 가진 그 오래된 다리, 내 마음속의 다리는 바로 그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자. 지금 이 다리가 있으므로 나는 옛날의 다리를 만날 수 있고 내 어린 시절과 만날 수 있다. 다리는 또한 과거와 현재를 만나게 해준다. 그래서 다리이다.
다리 밑 하천 부지에서 논개의 쌍가락지를 형상해 얹은 교각을 바라보며 내 삶에서 나는 어떤 다리들을 놓아왔는지 생각해 본다. 나는 몇 개의 다리를 얼마나 튼튼하게 놓았을까. 그 다리의 끝에 있는 사람과 세상은 누구이며 무엇일까. 저 피안에 이르는 다리는 없을까.
유년의 추억 물들인 곰살맞은 정경들
토요일 오후 혼자걷는 다리
소리없이 흐르는 강물
이토록 아름다운 구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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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진주에 가면 '배다리', '배건너'라는 말이 아직도 쓰이고 있다. '배다리'는 배를 다리의 교각 대신으로 삼고 그 위에 상판을 얹은 임시 다리를 뜻한다. 1920년대에 남강에 만들어졌다가 몇 년 후에 '남강다리'가 생겨 없어진 다리지만 80년이 지난 지금에도 '배다리'는 진주 사람에게 친숙한 단어이다. '배건너'는 그 배다리를 건넌 저쪽을 의미한다. 진주 사람들은 지금도 강 건너 저편을 서로 '배건너'라고 지칭한다. '강 건너'도 아니고 '다리 건너'도 아닌 '배건너'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아련한 유년의 추억과 함께 곰살맞은 정감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중학교 삼 년 동안을 꼬박 남강다리를 통해 '배건너'를 건너다녔다. 봉래동에 있는 집에서 학교가 있는 칠암동까지 걸어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 시내 버스가 있긴 했지만 버스를 탄 기억은 별로 없다. 십리 가까이 되는 그 길을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내내 걸어 다녔던 것 같다. 공휴일을 제외하곤 나는 꼭 하루에 두 번씩 남강다리를 건너다녔던 셈이다. 내가 다리란 말을 들으면 언제나 자동적으로 그때의 남강다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 것은 그런 덕분일 것이다. 그때 함께 남강다리를 건너다녔던 친구들의 이름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남강다리가 내 유년의 기억 속에 아주 튼튼한 교각을 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등·하굣길은 힘들었다. 그 길은 진주 시내 이쪽 끝에서 배건너 저쪽 끝까지를 관통해야 하는 먼 길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고집스레 그 길을 걸어다녔다. 버스를 타면 몇 분 걸리지도 않았고, 차비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 힘든 길을 걸어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마도 남강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매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시내 길을 빠져나와 다리 입구에 이르면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졌다. 시야가 갑자기 탁 트이고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왔다.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강 밑바닥의 모래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피라미들이 보일 지경이었다.
"저게 뭐야? 저게 뭐야?"
장난기가 발동한 우리는 난간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며 굉장한 걸 본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가 모여서 있는 난간 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건너편 보도를 걷던 어른들까지 차도를 위험스레 건너서 달려왔다.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중에는 다리를 건너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있는 난간 쪽으로 몰려와 무슨 일인가 하고 다리 아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살펴보곤 했다. 그때쯤이면 우리들은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와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난간 아래엔 늘상 그대로 강물이 흘러 갈 뿐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작당을 하여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그런 장난질도 좋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한 것은 혼자서 다리를 건너는 일이었다. 특히 토요일 오후 호젓하게 혼자서 다리를 건널 때 나는 종종 다리 한가운데 난간에 기대서서 강물의 상류와 진주성과 촉석루를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오월의 햇살이라도 비출라치면 소리 없이 흘러가는 강 물결은 은어 비늘처럼 반짝였다. 성터 숲은 신록으로 물들어가고 잎새들은 가벼운 바람에 일제히 몸을 뒤척였다. 그 숲 사이로 날아갈 듯 솟아 있는 촉석루의 처마는 고운 한복 차림을 한 여인네의 어깨선을 닮아 있었다. 그 숲과 촉석루가 푸른 강물 위에 거꾸로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풍경, 햇빛과 강물과 숲과 누각이 자아내는 그 아름다운 구도는 나를 행복하게 했다. 내가 살아 있어 그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하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라고 노래한 변영로의 시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것은 그때 내가 다리 위에서 진주성을 바라보며 곧잘 읊조렸던 시일 뿐만 아니라, 그 시의 궁극적 의미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구절이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는 듯 해서이기도 하다. 그 시를 속으로 읊조릴 때면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 풍경이 가져다 주는 행복감을 표현한답시고 되지도 않은 시를 몇 편 끄적거렸던 기억도 있다.
그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던 것 같다. 강과 숲과 햇빛에 대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나 자신과 인간에 대해서. 나는 실상 그때 공부나 책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그 풍경에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에 빠져든 것도 그즈음의 일인 것 같다.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을 성서처럼 끼고 살았다. 나 자신이 한스가 된 것도 같고 데미안이 된 것도 같았다. 나는 그렇게 남강다리를 건너다니며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에 부모님의 걱정과 질책에도 불구하고 공부보다 문학과 예술에 더 심취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출발점이 바로 남강다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강은 흔히 고을과 고을을 나누어 그 경계를 이룬다. 또한 강은 사람과 사람을 나누어 이별하게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루에서의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와 시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고대가요 '공무도하가'나 고려가요 '서경별곡'이나 정지상의 한시 '송인' 등도 강에서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하다못해 유행가 '눈물 젖은 두만강'도 떠나는 님을 목 놓아 부르고 있지 않은가. 강은 또한 차안과 피안, 삶과 죽음을 나누는 경계이기도 하다. 기억과 망각 사이를 흐르는 레테강과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요단강이 그러하다. 강이 이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를 나누는 것이라면, 그 강기슭에 서서 서로의 '배건너'를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고 잃어버린 과거를 그리워하고 죽음의 세계로 떠나버린 지인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은 만남과 소통을 소망한다. 그 소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람들은 강 위에 다리를 놓는다. 그래서 다리는 고을과 고을을 이어주고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하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어린 중학생을 만나게 해준다. 자아와 타자, 자아와 세계를 소통시키고 연락케 한다. 또한 그것은 차안과 피안을 만나게 하여 인간을 초월케 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에 더 많은 다리들이 생겨 보다 풍성한 만남과 공감이 생겨난다면 우리 삶도 살아볼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남강다리를 걸어서 건넌다. 이제 남강다리는 현대식으로 고쳐져 옛모습을 잃었다. 새로운 다리가 아무리 날렵하고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서 있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내 중학교 시절의 남강다리를 사랑한다. 좁은 보도와 낮은 난간을 가진 그 오래된 다리, 내 마음속의 다리는 바로 그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자. 지금 이 다리가 있으므로 나는 옛날의 다리를 만날 수 있고 내 어린 시절과 만날 수 있다. 다리는 또한 과거와 현재를 만나게 해준다. 그래서 다리이다.
다리 밑 하천 부지에서 논개의 쌍가락지를 형상해 얹은 교각을 바라보며 내 삶에서 나는 어떤 다리들을 놓아왔는지 생각해 본다. 나는 몇 개의 다리를 얼마나 튼튼하게 놓았을까. 그 다리의 끝에 있는 사람과 세상은 누구이며 무엇일까. 저 피안에 이르는 다리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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