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그룹

적성도 좋지만

石泉 2011. 4. 2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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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도 좋지만

2011.04.21


대학 졸업반인 아들애가 밥상머리에서  며칠 전에 친구가 학교를 그만뒀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고등학교도 함께 다니고  책을 읽어도 같은 걸 읽으며 생각도 비슷해서  대학도 둘이 같은 과를 택해 갔더랍니다.

“내가 영문과를 간 것도 걔 영향이 컸는데…”

“기왕 시작한 공분데 졸업을 코앞에 두고 그만둔 건 좀 그렇네.”

“대학 공부하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거기다 자기한테 안 맞는 걸 어떻게 끝까지 해요. 잘 그만둔 거지.”

호주에 살면서 신물나게 들어온 레퍼토리가 또 시작되려나 봅니다. 바로 ‘적성타령’입니다.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면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유별나게 구는 이 나라 젊은이들의 밉상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건만 졸업을 1년도 채 안 남겨 놓고 휴학이라면 모를까, 아예 관둬 버렸다니 역시나 유별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성 타령’은  아무래도 대학에 진학한 부류에서 심한지라  대학생들 중에는,  예를 들어 공대에서 약대로, 의대에서 법대로, 또 그 반대로  옮겨다니는,  이른바   전과를  일삼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니 나이는  점점 차가는데 노상  1학년인 학생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영부영’은 꿈도 꿀 수 없는,  시쳇말로 ‘빡세게’ 공부해야 하는 이 나라 대학 현실에서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계속한다는 건  이만저만  고통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는 않습니다.

여북하면 새내기 대학생들 사이에  “나 다시 고3으로 돌아가고파~  ” 라는 절규가 터져나오겠습니까.  매년  낙제생이 부지기수니  이래저래 호주에서는 대학생이 있는 집에다 대고 “댁의 자녀는 지금  몇 학년입니까?”  혹은 “언제 졸업하나요?” 라고 묻는 것은  실례라고 하지요.

물론 적성에 맞는 미래를 계획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만큼 행복하고 바람직한 삶도 없을 것입니다. 누군들  자신의 소질이나 전공 분야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느라 평생을 부대끼고  종당엔 회한에 젖고 싶겠습니까.  

사전을 찾아보니 적성이란  어떤 일에 적합한 소질이나 성격,  적응 능력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일’에 알맞은 소질을 타고났는지,  나아가 그 ‘어떤 일’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다만 그 ‘어떤 일’을 꾸준히 해보는 도리밖에 없겠지요.  또한 얼마나 오래 그 일을 해봐야 할지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저희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한 청년의 예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청년은 3년간 요리사 과정을  밟으면서  소위 자기 적성이 아니라는 생각을 수시로 했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길을 모색하기에는 지나간  시간이  아깝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부모님께 다시 손을 벌리기가 송구했다고 합니다. 22년간 자신을 뒷바라지해 준 부모님을 생각하면  적성을 따지기 이전에 무슨 일을 해서라도  이제부터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외동아들로 왕자처럼 자랐다고 하는 이 청년은  ‘왕자답게’  집에서는 부엌에라곤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청년이 어엿한 요리사가 되어 이제 겨우 스물다섯의 나이에 낯선 나라에서  호구지책  이상의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대견한가요.  

만약  요리사가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이제는 이 일이 좋은지를 물으니 이전에는  IT계통을 하고 싶었지만 하다보니 요리가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인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3년 전, 요리 공부에  회의가 일 때 그만두지 않았던 것이  참 잘한 일이었고, 무슨 일이든 힘든 고비를 넘겨봐야  진정 그 일이 내 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덧붙였습니다.

호주에 국한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말이 적성이지 일이나 공부에서 모자라는 인내심과 게으름, 의지박약, 두려움 따위에 대한  핑계를 찾느라 그렇게 둘러대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제 눈에는 ‘적성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쳐본들  일정한 고비를 넘기는 시점까지 노력하지 않는 한 어떤 일을 하건, 어떤 전공을 택하건 공회전의 반복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적성이고 뭐고 취업만을 목표로 내달려야 하는 한국의 젊은이들도 딱하지만 적성타령하며  제자리에서 맴도는 이 나라 젊은이들의 에너지 낭비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희 가게의 요리사 청년처럼  부모와 사회에 대한 성숙한 자세와 책임을 우선에 두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적성도 자연스레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청년들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1992년 호주 이민 후 <호주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며 한국의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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